프랑스 파리 개선문으로 향하는 샹젤리제 거리의 모습.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불빛축제 전구들이 밤 거리를 밝힌다. <사진 : 위키피디아>
프랑스 파리 개선문으로 향하는 샹젤리제 거리의 모습.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불빛축제 전구들이 밤 거리를 밝힌다. <사진 : 위키피디아>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거리를 산책했죠. 누군가에게 인사하고 싶었는데 당신이었어요. 우리는 춤을 춰요. 우리는 노래해요. 오 샹젤리제! 샹젤리제에는 햇빛 비추는 날이나 비 오는 날이나 낮이나 밤이나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답니다.”

1960년 조 다생(Joe Dassin)이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 ‘오 샹젤리제’의 가사처럼 파리 중심부 샹젤리제 거리는 음악과 사랑이 흐르는 곳이다.

필자에게 샹젤리제는 매우 특별한 장소다. 2012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롱 티보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였다. 세계 7대 클래식 음악 콩쿠르인 동시에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콩쿠르 위원장을 맡을 만큼 프랑스 음악계가 주목한 큰 이벤트다. 참가자 모두 라운드마다 자신의 예술적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 인내의 한계를 경험했다. 콩쿠르 일주일 후 파리의 유서 깊은 공연장 ‘살 가보’에서 본선 진출자가 발표됐고, 운 좋게 나도 후보명단에 올랐다.


라벨의 곡으로 발견한 샹젤리제의 추억

수많은 관객과 기자들이 밤 12시까지 결과 발표를 듣기 위해 발표장 안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나는 감당할 수 없이 차오르는 불안 때문에 차마 발표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건물 밖에 서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어렵게 용기 내 발표장 문을 여는 순간 필자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온몸은 돌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몰려드는 관객의 시선과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에 놀라 건물을 뛰쳐나왔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작정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환하게 켜진 루미나리에(불빛축제)의 환상적인 빛 안으로,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곳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은 크리스마스 루미나리에로 가득찬 샹젤리제 거리였다. 그리고 곧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사장조 제2악장의 멜로디가 가슴속에 조용히 울렸다.

피아노 협주곡 사장조 중 제2악장은 프랑스 인상주의 시대의 위대한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많은 작품 중 가장 아름답고 몽환적인 멜로디로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1931년 완성된 3악장 구성의 피아노 협주곡이고 라벨이 당시 파리에 상륙해 유행하던 재즈의 영향을 받은 흔적 또한 악곡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제2악장은 아다지오 아사이(Adagio Assai)의 느릿느릿한 템포 안에 사랑인지 이별인지 또 감성적인지 이성적인지 분간하기 힘든 모호하고 멜랑콜리한 3박자 계열의 멜로디가 왼손의 2박자 계열의 반주와 뒤섞여 끊임없이 감정을 자극하는 곡이다.

듣기에는 아름다운 곡이지만 긴 호흡의 선율에 느린 템포가 더해져 곡 후반부 주선율을 담당하는 관악 연주자에겐 몹시 고생스러운 곡이기도 하다. 나도 한 유럽 오케스트라와 협연 리허설 직후 관악 연주자가 대기실로 찾아와 더 빠른 템포로 연주하자고 사정하는 바람에 설득하느라 몹시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여름밤의 파리만큼 낭만적인 곳도 없다. 저녁 7~8시에 해가 지는 한국과 달리 비교적 높은 위도에 있는 파리는 한여름에는 밤 10시가 넘어도 밝은 하늘을 볼 수 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센강변을 거니는 연인들, 어쩌면 밤의 음악이라는 뜻의 ‘녹턴(야상곡)’이 노래하는 것이 바로 이런 순간 아닐까.


파리의 상징 센강의 모습. <사진 : 위키피디아>
파리의 상징 센강의 모습. <사진 : 위키피디아>

녹턴 연주하는 파리의 밤

내가 생각하는 파리의 여름밤을 잘 표현한 곡이 있다. 쇼팽이 1843년 여름 프랑스 노앙에서 완성한 녹턴 작품 번호 55의 2번 내림 마장조다. 부드럽게 몸을 휘감는 바람과 같이 따뜻한 멜로디, 뱃사공이 노를 저어가듯 어디론가 끊임없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듯한 셋잇단음표의 반주 음형을 듣노라면 평화로운 저녁노을 아래 인생의 황홀한 순간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프랑스에서 연주할 때면 이 곡을 꼭 앙코르 리스트에 넣는다. 그리고 이 녹턴의 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는 나도 관객도 지친 일상을 잊고 잠시나마 쇼팽의 선율에 기대 추억에 잠긴다. 연주를 마치고 편안한 관객의 표정을 보면 세상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행복을 맛보기도 한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파리와 어울리는 음반

라벨 피아노 협주곡 사장조
피아니스트 : 아르투로 미켈란젤리
지휘 : 에토레 그라치스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철두철미한 미켈란젤리가 해석한 연주. 한 시대를 풍미한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의 이성적인 타건은 모호한 감정의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쇼팽 녹턴 Op.55 No.2
피아니스트 : 알프레드 코르토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의 쇼팽 녹턴 연주는 눈부신 색채로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연주를 감상하면 듣는 즐거움을 넘어 마치 클로드 모네의 빛나는 화폭이 떠오르듯 시각적인 즐거움마저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