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궁중요리는 화려함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영화 ‘바베트의 만찬’의 한 장면. <사진 : 아마존>
프랑스 궁중요리는 화려함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영화 ‘바베트의 만찬’의 한 장면. <사진 : 아마존>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 관해서는 요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치즈·과일·고기·가공식품까지 모든 식재료의 이력 추적이 가능하다. 몇 백 년 전부터 ‘아펠라시옹 도리진 콩트롤레(AOC·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라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원산지만 보면 그 식재료의 품질부터 재배 방법, 맛까지 알 수 있다.

고급 요리로 인정받는 프랑스 요리의 원천은 사실 이탈리아 요리다. 고급 요리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딸인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가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에게 시집오면서 가져온 혼수품 중 하나였다. 그때까지 프랑스 요리 문화는 별것 없었다. 고기를 약간 야만적으로 손으로 집어 먹고 옷에 쓱 닦곤 했다. 14세 소녀 카트린이 데리고 온 요리사 덕분에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쥐고 음식을 먹기 시작한 프랑스 궁정은 요리에 눈을 뜨고 요리 문화를 발전시켰다.


옛 궁중요리는 요즘 구경할 수 없는 음식 많아

루이 14세부터 프랑스 요리는 세계적 수준으로 화려하게 꽃피웠다. 루이 14세 때 만들어진 왕립요리학교가 기틀이 됐다. 왕립요리학교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레시피(조리법)를 수집, 책으로 만드는 등의 노력을 했다. 오늘날 프랑스가 가장 많은 요리책과 레시피를 보유한 국가가 된 건 왕립요리학교를 통한 군주들의 노력 덕분이다. 프랑스는 다양한 레시피들을 활용해 손이 많이 가는 궁중요리 ‘오트퀴진’을 발달시켰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렸던 루이 14세의 연회는 12시간에 걸친 맛의 향연이었다. 반면 이탈리아는 19세기 후반까지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고 왕권을 바탕으로 레시피를 집대성할 기회가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궁중요리가 발달하지 못하고 가정식 요리에 그치게 된 이유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오트퀴진을 잘 보여준다. 바베트는 복권 당첨으로 얻은 1만프랑을 12명의 손님을 접대하는 데 모두 써버린다. 당시 1만프랑은 현재 우리 돈으로 억대의 가치를 가진 금액이었다. 그녀는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 ‘앙글레’의 수석 조리장 출신이었다.

바베트의 만찬은 바다거북이 수프(Soup de tortue geante)로 시작된다. 이 수프는 해적들이 먹던 진귀한 음식으로 당시 호사가들이 꿈에 그리던 요리다. 요즘 식탁에서도 구경하기 어렵다. 주로 지느러미를 사용해 만들기 때문에 삭스핀과 비슷한 식감을 가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바베트는 스페인산 백포도주 ‘아몬티라도(Amontillado)’를 함께 대접했다. 다음은 블리니 드미도프(Blinis Demidoff). 구운 빵 조각 위에 사워크림과 캐비어를 얹어 먹는 핑거푸드(손으로 쉽게 집어먹을 수 있는 음식)다. 샴페인 ‘뵈브 클리코 1860’이 함께 나왔다. 캐비어를 머금는 순간 혀끝에서 샴페인 거품이 톡톡 터진다.

메인요리는 ‘카이유 엉 사코파쥬(Cailles en sarcophage)’다. 제대로 쓰면 푸아그라로 속을 채운 메추리를 올린 페이스트리와 트러플(송로버섯) 소스로 만든 요리다. 메추리 요리를 빵으로 감쌌는데, 메추리 속에 트러플과 푸아그라를 채워 넣고 오븐에 구웠다. 마지막에는 플랑베(flambee) 과정을 거치는데, 팬에 코냑을 붓고 불을 붙여 요리에 향을 집어넣는다. 마무리까지 완벽한, 오트퀴진의 섬세함을 느끼게 해준다. 사코파쥬에는 이에 걸맞은 부르고뉴 지방의 와인 ‘클로드 부죠 1845’가 함께 제공됐다. 보디감(입안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가볍고 맛이 깔끔해 메추리나 오리고기에 어울린다. 피노누아 품종 특유의 미묘하고 연약한 듯한 맛이 느껴진다.

메인요리 뒤엔 샐러드, 치즈 디저트, 과일과 커피가 나온다. 프랑스인처럼 디저트에 열광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바베트는 바바 오 럼(Baba au Rhum)을 함께 내놓았다. 럼을 넣은 달콤한 시럽을 시폰케이크에 뿌렸다. 캐러멜 향이 그윽하게 퍼져 나간다. 프랑스인들은 단맛과 짠맛을 만찬 코스에서 확실하게 구분한다. 디저트 전 코스에서는 소금으로만 간을 하고 디저트 때는 설탕으로 단맛을 마음껏 보충한다. 바베트의 만찬은 끝났다. 1만프랑을 한 끼 식사에 날린 대신 초대된 이들의 마음은 너그러워졌고 검소함에 찌들어 우중충했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됐다. 요리는 이런 것이다.


프랑스 요리의 3대 진미 중 하나인 트러플.
프랑스 요리의 3대 진미 중 하나인 트러플.

독특한 이름은 프랑스 요리의 또 다른 즐거움

프랑스 요리의 즐거움 중 하나는 상상하지 못할 이름을 가진 요리를 만나는 것이다. 영화 ‘엘리제 궁의 요리사’에 나오는 아름다운 오로르의 베개(L'Oreiller de la belle Aurore)가 그중 하나다. 바베트가 만든 사코파쥬처럼 널찍한 파이를 만든 뒤, 이 안에 마치 베개 속을 채우는 것처럼 돼지고기, 닭고기를 넣고 오븐에서 굽는다. 기가 막히게 맛있다. 사코파쥬처럼 개성 있진 않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파이다.

다음에는 허브에 굴려 구운 새끼양갈비 요리(Cotes d'agneau au herbes)가 나왔다. 새끼양갈비가 허브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 귀엽다. 양갈비를 타임, 로즈메리, 파슬리 등의 허브에 굴린 뒤 오븐에 통째로 굽고 한 조각씩 잘라서 서빙한다. 보통 민트젤리와 함께 먹는다.

영화에서 침샘을 자극하는 요리는 또 있다. 요리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얇게 썰어 트러플을 얹은 빵이었다. 적당히 얇게 썬 긴 빵 위에 허브향 나는 버터를 쓱쓱 바르고 트러플을 척척 얹어 와인과 함께 먹는다. 앞선 메뉴들보다 소박해 보이지만 프랑스 요리의 3대 진미 중 하나인 트러플을 잔뜩 올린 빵은 전혀 소박하지 않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매일 먹고 싶은 맛일 것이다. 속이 빈 채로 영화를 봤더니 출출하다. 오늘 저녁은 프랑스 요리로 정했다.


▒ 박현주
보스턴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석사, 고려대 문화콘텐츠 전공 박사, ‘도시의 유혹에 빠지다’ 등 공연 콘텐츠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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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펠라시옹 도리진 콩트롤레(AOC) 프랑스 법규에 따라 농산물·식료품 등에 표기하는 원산지 명칭. 생산 구역, 품종, 재배 방법, 생산 방식 등의 요건을 충족했을 때, 프랑스 전국원산지명칭관리원의 승인을 받아 이 명칭을 표기할 수 있다. 농업 비중이 큰 프랑스는 ‘지리적 표시(Geographical Indication)’ 보호를 일찍 제도화한 나라다. 원산지 명칭, 소비자 보호 등에 관한 특별법규를 제정해 다른 나라에 앞서 지리적 표시를 보호해왔다. 가장 먼저 종합적인 틀이 갖춰진 것은 와인으로, 1935년 ‘와인의 원산지명칭통제에 관한 법령’에 의해 AOC의 카테고리가 확립됐다.
오트퀴진(Haute Cuisine) 소수의 상류층 연회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진미의 정찬.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의 카트린 드 메디치가 프랑스로 시집을 오면서부터 시작된 귀족들의 상류 요리로 고전주의 시대 루이 14세 집권기에 그 절정을 이룬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렸던 루이 14세의 연회는 12시간에 걸친 맛의 향연이었다. 이 요리는 귀족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다 혁명 후 귀족들이 몰락하자 요리사들이 궁 밖에 레스토랑을 열면서 일반인들도 누릴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