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이(shy) 보수’는 떳떳하게 보수임을 밝히지 못하는 숨은 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샤이는 선거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대에도 존재한다. 샤이 청년은 없지만 ‘샤이 꼰대’는 있다.
나이로 밀어붙이는 기성세대를 이른바 ‘꼰대(늙은이 또는 선생님을 뜻하는 은어) 샤우팅(shouting)’이라고 한다면, 생각과 경험을 당당하게 신세대에게 주장하고 제안하지 못하는 유형은 ‘꼰대 샤이’라 할 수 있다.
꼰대 샤우팅이 주위에 민폐를 끼친다면, 꼰대 샤이는 조직에 무기력함을 전염시킨다. 꼰대 샤우팅이 문제라고 해서 기성세대의 경험과 교훈을 모두 적폐로 삼는 것은 더 위험하다.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 낀 꼰대세대
이른바 꼰대로 지칭되는 40~50대 세대는 우리 사회에서 지적질의 대상이다. 혁신에 저항하고 변화에 뒤처진 것으로 여겨져 각성과 계몽의 대상으로 비판받는다. 조직 내에서 위아래를 연결하는 허리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도 많다.
일선의 팔팔한 직원들이 떨어져 나가면 안 되는 피 같은 ‘살점’이라면, 꼰대로 대변되는 기성세대는 떨어져 나가도 하등 표가 나지 않는 ‘각질’같이 인식되는 것이다. 이제 그 나이에 어디 간들 환영받을 리 없다는 걸 서로 뼈저리게 안다. 열심히 헌신한 죄밖에 없지만 존경받기는커녕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다’며 헌신짝 취급하는 이야기를 가정과 직장 양쪽에서 들을 땐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라는 회의가 절로 밀려온다.
그들은 나름 오늘날의 조직 성장과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밖으로는 ‘너네는 우리만큼 몸 바쳐 일해본 적 있냐’라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40~50대의 꼰대세대 관리자들을 만나면 ‘억울하다’며 낀세대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하면 된다’며 밀어붙이는 엄혹한 상사 치하를 겪어온 게 이들 세대다. 막상 그 자리에 올라보니 ‘되면 한다’는 구성원들을 ‘모시고’ 일해야 한다. 수평적 조직문화에서 부하라고 이야기했다간 개념 없는 상사로 당장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십상이다. ‘상사놀이’하는 상사 치하에서 압박과 설움의 세월을 보냈는데, ‘상사노릇’하는 기준만 하늘같이 높아져 한시도 허리 펼 겨를이 없다는 심경고백이다.
위태로운 금융 위기와 살벌한 구조조정의 칼날 위에서 늘 가슴 졸이고 고개 조아리며 시대와 세대의 아픔을 겪어왔다. 그런데도 고성장의 경제적 파도를 타고 쉽게 살아온 프리라이더(무임승차) 세대로 몰아붙일 땐 목울대가 얼얼하단다. ‘우리 아픔은 누가 위로해주고 대변해주나’란 게 꼰대세대 나름의 항변이다.
요즘 기성세대 각성 및 계몽을 위해 꼭 읽어 봐야 하는 글로 꼽히는 게 문유석 판사의 칼럼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이다. 이 중 특히 대중(정확히는 신세대)의 호응을 얻은 것은 ‘저녁 회식 금지론’이다. ‘젊은 직원들도 밥 먹고 술 먹을 돈 있다. 친구도 있다. 없는 것은 당신이 뺏고 있는 시간뿐’이란 내용이다. 이를 본 꼰대 부장들은 답답함을 표한다. 40대의 K 부장은 “우리라고 저녁시간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나라고 꼰대세대끼리 어울리는 게 편한 것을 모르겠는가. 나도 가족, 친구, 건강 모두 중시한다. 그럼에도 신세대 직원들에게 들이대며(?) 술, 밥을 먹자는 것은 소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또 다른 부장은 “저녁 회식과 점심 회식은 분명 이야깃거리가 다르다. 저녁 회식이 아무래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고 끈끈한 이야기가 오간다. 열 번 점심 회식이 한 번 저녁 회식만 못하더라”며 나름의 실전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경륜 바탕으로 성장 방향 잡아줘야
50대 초반의 S 부장은 “회식 때 사람은 오지 말고 법인카드만 보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땐 가슴이 아프다”며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현금카드로만 취급되는 현실이 슬프다. 회식을 어떻게 이끄느냐가 문제지, 무조건 자리를 피해 달란 것이야말로 불통의 사고방식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한국은 개인주의적 서구 사회와는 달리 관계 중심의 사회인데 끈끈한 정과 관계 구축 없이는 리더십 발휘가 힘들다는 이야기다.
저녁 회식 금지 외에도 꼰대세대가 삼가고 명심해야 할 계율은 차고 넘친다. 반면에 꼰대의 경험과 지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귀 기울일 것인가에 대한 균형적, 대칭적 시각의 이야기는 드물다.
전통 있는 사찰은 오래된 나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노승이 있기 때문에 전통이 있는 것이다. 이는 절뿐 아니라 조직과 우리 사회 전반에도 적용된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첨단 기술과 젊은 피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무르익은 경륜과 경험이 방향을 잡아줄 때 가능하다.
물론 꼰대세대의 경험이 ‘미래로 가는 덫’이 돼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닻 역할을 하는 것마저 무시해서도 안 된다. 꼰대의 경험을 최적화하기 위해 어떻게 전달할지가 문제지, 그 자체가 적폐 청산의 대상은 아니다. 수련과 단련의 도제과정을 일체 무시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신세대의 손해로 돌아간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꼰대가 문제가 아니라, 꼰대를 문제시하는 게 더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 어느 때보다 꼰대에 대한 경의가 필요한 때가 지금이 아닐까. 이건 아니다 싶지만 차마 말 못해 기죽어 사는 꼰대 샤이 당신, 오늘은 헛기침만 하지 말고 따끔하게 할 말은 하라.
▒ 김성회
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경영학 박사, 주요 저서 ‘성공하는 CEO의 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