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 중립성 원칙(Net Neutrality Rule)은 폐기될 것인가? 인터넷 자유는 물거품이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디지털 사업 기회가 열릴 것인가?”
아짓 파이(Ajit V. Pai·44)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Federal Communications Commision)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구글·애플·넷플릭스 같은 실리콘밸리의 거대 기업들, AT&T·컴캐스트 등 굴지의 통신 기업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으며 가슴을 졸이고 있다.
미국의 진보 미디어들이 “트럼프 정부가 인터넷을 질식시키려 한다”며 집중 포화를 하는 반면, 이익률 추락으로 울상이던 통신 기업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
1934년 출범한 연방통신위원회는 유·무선 통신, 방송 관련 각종 정책과 규제를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 CNN머니 등은 4월 26일(현지 시각) 워싱턴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아짓 파이 위원장이 ‘망 중립성 원칙’을 손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파이 위원장은 “망 중립성 원칙을 지지하지만 2015년 오바마 행정부가 도입한 오픈 인터넷 규약은 지나쳤다. 당시 (연방통신위원회 커미셔너였던) 나도 큰 실수라고 분명히 경고했다”라고 말했다. 파이 위원장은 “오바마 정부의 통신 정책은 연방 정부를 인터넷의 중심에 뒀다. 인터넷 사업자 규제는 자유시장에 맡겨야 한다”며 “망 중립성 원칙을 대체할 가벼운 규제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미국 디지털 경제의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오바마 정부 당시 톰 휠러가 이끌던 연방통신위원회는 유선 인터넷 사업자뿐 아니라 무선 인터넷 사업자들에게도 망 중립성 의무를 부과했다. AT&T·컴캐스트 등 통신, 케이블 사업자들은 무선 인터넷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온라인 사업자들도 통신 기업에 인터넷 망 설치 비용을 내야 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실리콘밸리 ‘나이스 가이’로 평가
이 같은 논란은 올해 1월 트럼프 대통령이 파이를 통신위원회 위원장에 지명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파이가 통신위원회 위원장에 지명되자 더버지는 ‘망 중립성 원칙의 파괴자’라 지칭했고, 디 인콰이어러는 ‘망 중립성 원칙의 폐지론자’라 불렀으며, 시넷은 ‘환하게 웃으면서 인터넷 자유를 끝장 낼 인물’이라 묘사했다. 디지털 전문 매체 등 진보 성향의 미디어들은 파이 위원장을 ‘인터넷 자유를 파괴할 악당’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반면 ‘포브스’ 등은 “40대란 젊은 나이에 법무부, 의회, 기업, 통신위원회를 두루 경험한 인사로 새 행정부의 통신 정책을 이끌 적임자다. 실리콘밸리에서도 환영받는 ‘나이스 가이(Mr. Nice Guy)’”라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그는 규제 철폐 등 트럼프 행정부의 방송, 통신 정책을 실현할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망 중립성 원칙’은 통신망 사업자가 인터넷상의 모든 콘텐츠를 차별 없이 중립적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광대역 통신망 사업자가 인터넷 사이트 이용, 앱 등의 다운로드를 차단하거나 속도를 줄이거나 추가 요금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의 근거가 되고 있다. 1930년대 미국 정부가 “열차, 버스 등 운송 회사는 승객의 신장, 몸무게 등을 이유로 요금에 차별을 둬서는 안 된다”는 ‘유니버설캐리어(Universal Carrier)’ 원칙을 확립한 이래 통신 산업 규제의 기본 원칙이 됐다.
망 중립성 원칙은 인터넷 시대의 통신 사업자, 인터넷 서비스 기업들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가령 오후 8~10시 미국 인터넷 트래픽의 60%가량을 넷플릭스나 훌루 같은 스트리밍 영상 서비스 업체가 차지하는데, 통신 사업자들은 망 중립성 원칙에 따라 넷플릭스나 훌루에 더 많은 통신망 요금을 부과할 수 없다.
더버지 등 진보 미디어들은 “망 중립성 원칙 덕분에 과거 스타트업 기업이던 구글, 페이스북 등 인터넷 기업들이 굴지의 디지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망 중립성 원칙이 폐지되면 통신사들이 인터넷 트래픽 정도에 따라 요금을 차별 부과할 것이고, 이는 신생 스타트업 기업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재앙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반면 통신 사업자들은 “통신 기업들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통신 설비를 설치하지만 정작 과실은 통신 설비 구축에 돈 한푼 안 낸 인터넷 서비스 기업들이 독식하고 있다. 과도한 망 중립성 원칙 때문에 설비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정부 개입 최소화해야 소비자 이익”
파이 위원장은 ‘정부 규제보다는 자유 경쟁 시장이 소비자들에게 더 이익’이라는 소신이 뚜렷한 대표적인 규제 철폐론자로 꼽힌다. 그는 2012년 6월 미국 하원에서 “정부 규제의 결과는 불확실하다. 커뮤니케이션 산업의 역동적인 변화에 부응해 정부 역할도 변해야 한다. 연방통신위원회는 경제성장, 정보통신 분야 일자리 창출, 인터넷 이용자들이 더 나은 서비스를 더 낮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2012년 카네기멜론대 강연에서는 “통신 인프라 투자를 막는 규제를 제거해야 한다. 모바일 브로드밴드 기반 확충을 위해 정부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글과 아마존 등 인터넷 사업자들의 케이블TV 시장 진출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해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파이 위원장은 최근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망 중립성 원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망 중립성 원칙 아래 무성히 자란 각종 규제의 잡초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미국의 디지털 혁신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규제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클린턴 정부에서 연방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리드 헌트(Reed Hundt)는 “파이 위원장은 매우 똑똑하고, 통신위원회라는 정부 기관과 관련 법규를 잘 아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디지털 신산업의 기회를 창출한 나이스 가이로 기억될지, 인터넷 자유의 파괴자가 될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법무부, 로펌 등 다채로운 경력

파이 위원장은 1973년 미국 뉴욕주 버펄로에서 인도 출신 의사 부부인 라다 파이와 바라다라지 파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도계 미국인 가운데 최고위직에 오른 인사로 꼽힌다. 하버드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1997년 시카고대 로스쿨에서 법학박사(J.D.) 학위를 땄다.
법무부, 의회, 기업, 로펌, 통신위원회 등 다채로운 경력을 자랑한다. 1998년 법무부 반독점 부서의 통신 관련 태스크포스팀에서, 2001~2004년 버라이즌에서 규제·광대역 통신사업부에서 일했다.
2004년 법무부, 2007~2011년 연방통신위원회에서 무선통신·케이블·인터넷미디어·위성 사업 분야를 담당했다. 2012년 로펌인 제너 앤드 블록(Jenner & Block)에서 커뮤니케이션 담당 파트너 변호사로 일했다. 2012년 5월 오바마 행정부에서 공화당 몫으로 연방통신위원회 커미셔너에 추천됐다.
제닌 반 랭커(Janine Van Lancker)와 결혼, 두 자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