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나뭇가지에 익숙해진 탓이었을까. 문득 창밖 색색의 빛이 내려앉은 화단 풍경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봄이 왔다. 지난 겨울이 유난히도 춥고 길었던지라 봄바람에 실려온 풀 내음은 얼어붙었던 마음을 상쾌한 음악 소리로 가득 채워준다.
늘 이맘때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지안니 스키키(Gianni Schicchi)’ 중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다. 풍성한 울림의 현악기 선율로 시작하는 아리아의 도입부는 마치 포근한 봄바람처럼 순식간에 우리를 감싸 안아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에 나지막이 펼쳐진 구릉으로 데려간다.
많은 예술가가 영감 얻기 위해 찾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난 그를 사랑해요, 그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중략) 만약 내 사랑이 헛되이 된다면, 베키오 다리로 달려가 아르노 강에 몸을 던지겠어요.’
오페라 지안니 스키키 중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미래를 허락해 달라는 딸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노래다. 만약 사랑을 허락받지 못하면 피렌체 중심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에서 몸을 던지겠다는 조금 과격한 표현마저 사랑스럽게 들릴 정도로 아름답고 유려한 선율이 일품인 아리아다.
오페라 지안니 스키키는 ‘나비부인’ ‘투란도트’ ‘라보엠’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자코모 푸치니가 1917~18년 작곡한 오페라로, 세상을 떠난 한 부호의 유산을 놓고 가족 간에 벌어지는 일을 유쾌하게 그린 코믹 오페라다. 지금은 오페라보다 아리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더 잘 알려져 있다. 피렌체 근교 루카(Lucca)에서 태어난 푸치니의 오페라에는 ‘꽃 피는 나무와 같은 피렌체’ 같은 곡들이 수록돼 있는데, 눈부신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말하고 있다.
‘꽃의 도시’로 불리는 피렌체는 르네상스가 시작된 도시로 많은 예술가가 영감을 얻기 위해 찾아왔다. 신의 세계를 위해 인간의 감정이 가차 없이 희생되던 천년의 중세시대가 지난 뒤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 위대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피렌체에서 신의 눈으로 정의된 세계를 인간의 눈으로 재정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문학에서는 단테의 ‘신곡’과 같이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의 이상적 질서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회화에서는 인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원근법이 등장했다. 종교음악을 넘어 인간 본연의 감정을 대변하는 세속음악도 조심스레 싹텄다.
차이콥스키·멘델스존도 노래한 피렌체
이후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원지를 넘어 유럽 인본사상을 선도하는 곳이 됐다. 도시 곳곳에 남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혼과 더불어 피렌체 특유의 목가적인 아름다움은 영감에 목마른 후세 예술가들에게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였다. 러시아의 거장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도 이곳을 매우 사랑했는데, 1890년 피렌체를 여행한 후에는 ‘피렌체의 추억’이라는 부제의 현악 6중주를 작곡하기도 했다. 4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차이콥스키가 늘 존중하던 고전적 형식을 바탕으로 역동적인 움직임과 함께 러시아인의 감성으로 바라본 피렌체의 낭만을 전하고 있다.
고전주의 낭만파 음악의 대가 펠릭스 멘델스존은 그보다 앞선 1833년 피렌체를 여행하고 독일로 돌아가 교향곡 제4번 작품번호 90 ‘이탈리아’를 작곡했다. 그는 이 곡에 자신의 ‘최상의 즐거움’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1악장 도입부 관악 파트의 빠른 연음과 함께 연주되는 경쾌한 바이올린의 부점 리듬(앞 음표가 점음표로 돼 있어 앞 음이 길고 뒤의 음이 짧은 리듬)은 마치 피렌체를 여행하며 기쁨에 젖어 빠르게 요동치는 멘델스존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꽃이 피어나는 봄, 푸치니의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한번 들어보길 권한다. 이 선율이 따뜻한 피렌체의 봄바람을 타고 여러분 마음에 다가가 수많은 감정의 꽃으로 아름답게 피어나길 기대해본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 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피렌체와 어울리는 음반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소프라노 l 바바라 핸드릭스
프랑스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ㅣ파보 예르비
소프라노 바바라 핸드릭스의 깊은 영혼에서 나오는 부드럽고 맑은 소리는 싱그러운 봄바람 그 자체인 듯하다. 파보 예르비의 지휘로 들어보는 아름다운 아리아 음반.
차이콥스키 현악 6중주 라단조 작품번호 70 ‘피렌체의 추억’
보로딘 현악 사중주단
비올라ㅣ유리 유로프
첼로ㅣ미하일 밀만
러시아 음악의 전통적인 해석으로 명망 높은 보로딘 현악 사중주단과 비올리니스트 유리 유로프, 첼리스트 미하일 밀만의 연주다. 이탈리아 태생 푸치니의 감성과 다른 러시안이 바라보는 피렌체의 낭만을 들을 수 있는 흥미로운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