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그라나다에 위치한 알람브라 궁전의 모습. <사진 : 위키피디아>
스페인 그라나다에 위치한 알람브라 궁전의 모습. <사진 : 위키피디아>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클래식 기타 연주곡으로 첫손에 꼽히는 불후의 명곡이다.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올 만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곡가인 프란시스코 타레가는 첫 소절부터 트레몰로 주법(같은 음을 같은 속도로 여러 번 치는 연주법)으로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덕분에 우리는 가보지도 못한 알람브라 궁전을 오래전부터 매우 친숙한 곳으로 생각한다. 이 친숙한 공간인 알람브라 궁전은 스페인의 그라나다라는 도시에 있다.

유럽의 맨 서쪽에 자리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적인 국가가 스페인이다. 그중에서도 그라나다는 이슬람 색채가 짙게 드리운 곳이다. 유럽의 역사와 함께한 가톨릭과 이슬람 사이의 종교전쟁 영향을 그라나다도 받았다.


그리스 문화에 이슬람 색채 입힌 그라나다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 왕국을 세운 건 가톨릭교도인 서고트족(게르만의 한 부족)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 계승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일부 왕족 세력이 바다 건너 무어인(이슬람교도 아랍인)들을 끌어들였다.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무어인들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곧장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와 서고트 왕국을 격파해버렸다. 무어인들은 이후 800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부를 지배했다.

이런 역사적 비극은 그라나다 건축에는 축복으로 작용했다. 당시 이슬람에는 의학, 법학, 과학 등 실용주의 학문이 발달해 있었다. 특히 건축 분야는 서양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양보다 일찍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세워진 이슬람 건축물들은 뛰어난 문화와 기술력으로 서양 건축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비잔틴, 페르시아 양식의 돔과 뾰족한 첨탑이 있는 모스크(사원), 그 안을 채운 아라베스크(아라비아풍) 무늬의 실내장식은 언제 봐도 빼어나게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 건축의 꽃으로 불린다.

그라나다는 스페인에서 13번째로 큰 도시다. 1238년 알 갈리브 무함마드 1세는 이곳에 나스르 왕국을 세웠고 1492년 멸망할 때까지 250년간 왕조를 유지했다. 그라나다는 가톨릭 세력에 의해 점점 위축되는 이슬람 세력의 유럽 내 마지막 거점지였다.

알람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란 뜻이다. 햇볕에 말린 벽돌의 붉은 빛에서 궁전의 이름이 유래됐다. 무함마드 1세는 나스르 왕조를 세운 다음 해부터 한눈에 보이는 구릉 위에 이 정교하고도 화려한 복합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알람브라는 14세기까지 증축과 개수(改修) 과정을 거쳐 비로소 완성됐다.


나스르 궁전의 ‘사자의 중정’ 모습. <사진 : 박현주>
나스르 궁전의 ‘사자의 중정’ 모습. <사진 : 박현주>

‘알바이신 지구’ 에서 바라보는 전경도 일품

알람브라는 크게 나스르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헤네랄리페, 알 카사바 등 네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나스르 궁전은 알람브라 궁전 관람의 백미로 왕의 집무실이자 생활공간이었다. 벽면과 천장을 장식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타일과 석회 세공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194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은 나스르 궁전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슬람 세력이 물러난 16세기에 카를로스 5세가 이슬람 건축에 대항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무데하르 양식(이슬람풍의 그리스도교 건축양식)의 겨울궁전을 철거하고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다. 알람브라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양식이 아니다.

그라나다에서 알람브라 궁전으로 오르는 오솔길을 10분 정도 따라가면 궁전의 동쪽 높은 언덕에 그라나다 왕들의 별장이었던 ‘헤네랄리페’가 있다. 이곳에는 무어인들이 장미는 물론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관목인 쌍떡잎식물 도금양을 심어 이국적인 운치가 느껴진다.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이 궁전은 알람브라 궁전보다 50m나 더 높은 서향 언덕에 위치해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알 카사바’는 9세기에 지어져 13세기에 완성된 요새로 알람브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전성기 때는 24개 망루와 군인 숙소, 창고, 목욕탕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있다. 중앙에 있는 ‘벨라의 탑’에 오르면 알람브라 궁전 내부와 그라나다 중심부 일대의 수려한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나스르 궁전에는 아라야네스 파티오, 대사의 방, 사자의 중정(中庭·건물 안이나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뜰), 두 자매의 방 등 세련된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들이 집중돼 있다. 이곳은 정해진 시간에만 관광을 허락해 예약이 치열하다.

나스르 궁전의 관람은 왕이 집무를 보던 ‘메수아르 방’에서 시작된다.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된 벽면과 천장의 아름다움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메수아르 방을 지나면 남북 35m, 동서 7m의 직사각형 연못을 갖춘 정원 ‘아라야네스 중정’을 만나게 된다. 양옆으로 아라야네스라 불리는 꽃이 심어져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다음에 만나게 되는 ‘대사의 방’은 한 변이 11m나 되는 정사각형의 방으로 왕조의 공식 응접실로 사용됐다. 벽에서 천장까지 놀랍도록 섬세한 아라베스크 양식으로 조각돼 있다.

왕궁 관람의 하이라이트는 ‘사자의 중정’이다. 중정은 124개의 가느다란 대리석 기둥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기둥 머리를 아치로 연결한 모든 벽면에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만들었을 것 같지 않은 정교하고 유려한 석회 세공이 빈틈없이 입혀져 있다. 중앙에는 정원 이름의 유래가 된 ‘사자의 샘’이 자리잡고 있다. 12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커다란 원형 분수다. 이곳은 왕의 철저한 사적 공간으로 왕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됐다.

‘두 자매의 방’은 이슬람 장식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곳의 천장에는 무려 5000개에 달하는 다양한 무카르나 무늬가 사용됐다. 무카르나 기법은 나무나 석회로 적당히 작은 조각을 만들어 일일이 벽에 붙여 장식하는 것을 뜻한다.

알람브라 투어를 마친 후에는 ‘알바이신 지구’로 넘어갈 것을 권한다. 그라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곳으로 알람브라 궁전이 생기기 전에는 이슬람 왕조들의 거처이기도 했다.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몰려있는 하얀 집들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의 향취를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상에 올라 성 니콜라스 성당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알람브라 궁전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전경은 일품이다. 클래식 기타 연주곡 ‘그라나다’가 활기차게 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keyword


아라베스크 아라비아풍이라는 뜻으로 좁은 의미로는 이슬람 미술에서 양식화된 잎이나 꽃, 열매 등의 모티브를 엉킨 덩굴풀과 같은 곡선으로 연결한 독특한 장식무늬를 뜻한다. 넓은 의미로는 이슬람의 장식무늬 모두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