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특수부대 코만도의 후신인 ‘SAS(Special Air Service)’ 부대원들이 1943년 북아프리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영국 특수부대 코만도의 후신인 ‘SAS(Special Air Service)’ 부대원들이 1943년 북아프리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제2차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됭케르크(Dunkerque·프랑스 북부 도시) 철수’ 이후 영국 본토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독일군은 단 6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했다. 이는 프랑스만의 패배가 아니었다. 영국 지상군도 이 전쟁에 참여했다가 프랑스와 똑같은 패배를 맛봤다. 다만 기적적인 사실이 있었는데, 됭케르크 철수 작전으로 33만8226명이란 엄청난 병력을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됭케르크 해안에 엄청난 장비와 소총까지 버리고 와야 했다. 8~1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물량이었다. 병사가 있어도 무기가 없으면 싸울 수 없다. 영국군은 당장 소총도 부족했다. 처칠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해안 시찰을 나갔을 때 해안 포대의 포병이 포탄이 3발밖에 없다고 말했다. 영국은 사실상 무장해제 상태였다.

영국군 사령부는 고민에 빠졌다. 군수품 생산과 병참을 회복해서 재무장을 할 때까지 영국군이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해서 독일군의 기세를 꺾어야 하고,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야 했다.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도 중요했다. 국민들의 사기와 항전 의지가 떨어져 정전 조약이나 항복을 요구하면 민주주의 정부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때 영국군 사령부의 한 소령이 소규모 특공대를 편성해 해협을 건너 독일군의 진지를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상했다. 영국군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특수부대를 지칭하는 ‘코만도(Commando)’의 시작이다.

처음 코만도를 구상했을 때에는 군사적 효과를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소규모 기습부대의 공격은 해안에 가까운 독일군 막사나 탄약고, 통신시설 등을 습격하고 달아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런 타격은 전술적으로 유의미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단지 독일군을 경계하게 만들어 최대한 독일군의 상륙시기를 늦추고, 무엇보다도 영국군의 영웅적인 활동상을 선전함으로써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중 스코틀랜드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영국 특수부대 ‘코만도’ . <사진 : 위키피디아>
제2차세계대전 중 스코틀랜드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영국 특수부대 ‘코만도’ . <사진 : 위키피디아>

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탄생한 ‘코만도’

코만도를 창설하자 의외로 의욕에 찬 엘리트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특수작전의 개념이 전혀 없던 시기라 이 용감한 병사들로 무엇을 할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무엇을 훈련시킬지도 애매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코만도의 훈련은 지독하게 낭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스포츠 지원자를 모았는데, 게임 종목이 정해지지 않은 격이었다고 할까? 그들은 닥치는 대로 보통 병사들은 할 수 없는, 힘든 훈련을 했다. 그래도 이런 훈련이 기능보다는 육체와 정신력을 강화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말한다면 여기까지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벌어진 실전은 특수부대 역사라는 기준에서 보면 일종의 방황기였다.

이 정체불명의 부대는 닥치는 대로 작전에 투입됐다. 노르웨이 로포텐 제도 습격, 프랑스의 디에프항 상륙작전 같이 일반 정규군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위험한 작전 또는 자살 공격에 가까운 임무에 투입됐다. 적진 정찰, 후방 교란, 탄약고 폭파, 암살, 납치 업무 등 소규모 작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국민의 사기 진작이란 관점에서 보면 코만도의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황기 동안 무시무시한 훈련을 견뎌낸 용감하고 강철 같은 병사들이 비효율적으로 소모됐다.

이 상태가 계속됐더라면 코만도는 소진됐을지도 모른다. 1941년 코만도 대원이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데이비드 스털링이라는 대위가 돌파구를 찾았다. 그리스 크레타 섬 전투에서 동료들을 거의 잃고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스털링은 사막이라는 가혹한 환경이 특수부대원에게 놀라운 은신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광활한 사하라는 몸을 숨길 곳이라고는 도무지 없을 것 같지만, 사막은 바다보다도 위험하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 장대한 사막을 무대로 베두인족 같은 사막부족들은 수천년간 소규모 기습과 약탈로 먹고 살아 왔다. 스털링은 낙타 대신 지프와 트럭을 타고, 원주민의 지형 감각 대신 위치정보시스템(GPS)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장비와 기술에 의지해 후방 기습부대를 창설했다.

특수부대에게 사막은 또 하나의 장점을 제공했다. 사막이 워낙 광대하다 보니 보통의 정규군이 움직이는 공간과 주둔지, 주요 시설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적의 동선은 뻔하고 기습부대의 동선은 무한정이었다.

이 습격부대는 독일군 후방의 탄약고, 통신시설, 비행장을 닥치는 대로 습격했다. 특히 비행장 습격이 유명했는데, 이들은 활동개시 12개월 만에 독일 공군기 250대를 파괴했다. 독일군은 할 수 없이 최전선에 있던 정예사단을 시설 경비부대로 돌려야 했다.

스털링의 아이디어로 코만도는 비로소 정체성을 찾았다. 그의 부대는 ‘SAS(Special Air Service)’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었다. 별다른 의미는 아니고 이 부대의 목적을 위장하려고 만든 명칭이었다. 그러나 스털링 부대의 대성공으로 SAS는 20세기 가장 위대하고 성공적인 특수부대가 됐고, 오늘날에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에 코만도는 해체됐다. 다만 특수부대를 총칭하는 일반 명사가 됐다. 코만도의 병사들에게는 그것이 더 영광이고 코만도에 합당한 대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코만도가 왜 SAS처럼 하나의 부대로 존속하지 못하게 됐는가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창의, 아이디어, 도전, 용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인드라는 말에 ‘지겹다’는 반응을 보인다. 일시적으로는 가슴이 뛸 수 있지만 창의적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환경 모두가 적용과 창의의 대상

창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방황하던 코만도의 정체성은 스털링이 사막이라는 환경을 만나면서 방향성을 찾았다. 그도 전체 특수부대의 운명을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부대원의 능력을 사막이라는 환경과 목적에 적용시킨 것뿐이다.

내게 주어진 문제, 기술,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 영감, 그것을 적용할 영역은 나의 일상 모든 곳에 열려 있다. ‘손자병법’의 오의도 지피지기(知彼知己), 출기불의(出其不意)와 같은 경구를 외우라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모든 환경, 지형에 적용하려고 노력해 보라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 사건, 작은 환경 모두가 적용과 창의의 대상이다. 실천을 하면 지겨울 수가 없다. 매일 새로운 환경이 나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임용한
경희대 대학원 사학 박사, 경희대·공군사관학교 한국사·군제사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