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하버(왼쪽에서 두번째)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인들에게 화학 가스 개발을 지시하고 있다. <사진 :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프리츠 하버(왼쪽에서 두번째)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인들에게 화학 가스 개발을 지시하고 있다. <사진 :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1918년 스웨덴 왕립 과학원은 그해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독일의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공기 중에 무한정으로 존재하고 있는 질소를 저온에서 높은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농축시켜 암모니아를 생산할 수 있는 합성법을 1908년에 발견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인공 암모니아 합성법은 화학상이 아니라 평화상을 수상받아도 모자람이 없는 업적이었다. 이렇게 만들어낸 암모니아를 이용하면 저렴한 가격에 질소비료를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70억명이 넘는 인류가 먹고살 수 있는 결정적인 길을 열어준 것이다.

1900년 세계 인구는 약 16억명이었다. 약 10억명이었던 1800년에 비해 100년 동안 6억명 정도가 늘어난 것이지만 이로 인한 식량 문제는 심각했다.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 대기근에서 보듯이 산업혁명 이후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이로 인한 식량 부족을 고려할 때 유럽인들의 신대륙 대거 이주나 제국주의 침략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나의 배를 먼저 채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제3세계 지역에 대한 혹독한 수탈과 착취를 제국주의자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수리 시설을 확충하고 개간을 통해 농경지를 추가 확보하더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식량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오래 전부터 퇴비 등을 사용했지만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휴경지를 둬야 해 불가피하게 놀리는 땅도 많았다. 이처럼 유럽이 인구 과잉과 식량 부족으로 고민이 많았을 때 신대륙에서 채굴된 칠레초석은 가히 복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연 질소비료인데, 이를 사용하면 놀라울 정도로 생산량이 늘어났다.

옥시레킷벤키저는 가습기 살균제의 안전성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고 판매해 수많은 사망자를 냈다. 사진은 지난해 한 대형마트에서 열린 ‘옥시 불매운동’.<사진 : 조선일보 DB>
옥시레킷벤키저는 가습기 살균제의 안전성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고 판매해 수많은 사망자를 냈다. 사진은 지난해 한 대형마트에서 열린 ‘옥시 불매운동’.<사진 : 조선일보 DB>


영웅에서 독가스 개발한 전범으로 전락

하지만 유럽까지 운송이 어려워 가격도 비쌌고 자원이 한정돼 결국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수단이 될 수는 없었다. 이처럼 고민이 많았을 때 싼 가격에 질소비료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덕분에 이후 식량 생산량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증가했다.

만일 하버의 업적이 없었다면 아직도 인류는 기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세계 인구가 섭취하는 영양원의 약 3분의 1이 질소비료의 혜택에 의한 것이다. 질소비료가 없었다면 생존 가능한 인류의 최대치가 36억명 정도로 추산되니 그가 현존 인류에 끼친 영향은 가히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업적을 남긴 하버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공기로 식량을 만드는 과학자라는 명예를 얻었음에도 제1차세계대전 당시에 독가스를 만들어내고 전선에 나가 연합군을 상대로 실험까지 실시한 경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1차세계대전 후에 그에게는 ‘화학무기의 아버지’라는 악명이 붙었다.

전후 국제 사회가 화학무기 사용 제한에 동의하고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나치도 보복이 두려워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을 만큼 그가 만든 독가스의 살상력은 엄청났다. 문제는 당국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 동료 학자이자 아내인 클라라 하버가 반대하며 자살했을 정도로 하버가 앞장서서 개발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업적과 별개로 국제 사회가 그의 노벨상 수상에 반대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전범으로 몰려 스위스로 피신한 상태였다. 이후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으로 다시 영전해 독일의 화학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으나 1933년 나치의 등장과 함께 몰락했다.

유태인이었던 하버는 박해는 모면했지만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독일에서 쫓겨나 1934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객사했다. 그런데 그가 남긴 그림자는 너무 짙었다. 1920년대 살충제로 만든 치클론 B(Zyklon B)가 동족인 수백만 유태인을 대량 학살하는 데 사용됐고 그렇게 죽어간 이 중에는 그의 친척도 있었다.


기업도 이익만 추구하면 위험에 빠져

하버는 수십억명의 인류가 더 살아갈 수 있는 결정적 방법을 만들었지만 수백만명의 생명을 고통 속에 죽어가도록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도 모든 성과가 완벽하고 이성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행위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버는 부족한 천재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기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익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익만을 추구하다 보면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고 이를 넘어 피해까지 줄 수 있다. 옥시레킷벤키저를 비롯한 여러 회사에 의해 벌어진 국내 최악의 환경 재해였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단지 잘 팔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에게 치명적인 물질을 별다른 고려 없이 쉽게 사용했다는 것은 두고두고 생각할 부분이다. 뒤늦게 일부 업체가 사과와 보상 입장을 표명했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이 사건을 보면, 기업은 100개의 좋은 제품보다 하나의 나쁜 제품을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근무, 현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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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하버(Fritz Haber) 독일의 화학자. 질소와 수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연구해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가스 개발과 살포를 주도해 ‘화학무기의 아버지’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