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코 등 한국의 철강 기업들이 미국 워싱턴 상무부 관리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산 등 외국산 수입 철강 제품이 미국 경제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 중인 미 상무부의 최종 판정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외국산 철강재가 미국의 안보를 침해한다는 결론이 나오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가 관세 부과, 수입 쿼터 부과 등 수입 조정 조치를 발동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 철강 기업들의 저가 공세로 가뜩이나 고전하는 한국 기업들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삼성전자, LG전자 미국 법인 관계자들은 요즘 미국 무역위원회(ITC)에 노상 불려다니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서 베트남과 태국산 세탁기를 덤핑으로 팔고 있어 피해를 입었다고 월풀이 제소했기 때문이다.
ITC는 9월 7일 공청회에 이어 10월 5일까지 덤핑 여부를 판정할 예정이다. 최악의 경우 9월 말쯤 삼성전자, LG전자 세탁기에 대해 긴급 세이프가드 조치가 내려질 가능성도 있다. 피나는 노력으로 올 1분기 미국 세탁기 시장 점유율을 17%로 끌어올린 삼성전자, 13.4%를 차지한 LG전자가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두 기업 모두 대응책 마련에 전전긍긍하고 있지만 뚜렷한 묘책은 없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한국과 미국을 잇는 태평양 상공에 통상 마찰의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당장 8월부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이 시작된다. 두 나라와 각국 기업들의 첨예한 이해가 맞서는, 치열하고 지루한 재협상이 기다리고 있다. 협상 결과에 따라 양국 갈등이 격화되고 국민 감정이 상할 수 있다. 무역협정 개정 협상만 현안은 아니다. 기업과 무역 관계자들은 반덤핑 관세 등을 앞세운 미국의 통상 공세가 이미 시작됐고 갈수록 거세질 전망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는 ‘위대한 미국 재건’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함께 예상됐던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기간 내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 미국이 각국과 맺은 무역협정들은 미국 기업들에 불리한 불공정 협상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협상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당선되자마자 협정 개정의 고삐를 바짝 조이고 있다. 지난 6월 파리기후협약 탈퇴 선언은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이 선언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방증한다.
“틸러슨은 러시아, 로스는 아시아 담당”
G2 국가로 성장한 중국과의 갈등이 우선 부각되고 있지만 미국은 전통 우방인 캐나다, 멕시코에 대해 북미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아직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일본에 대해 자유무역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요구하고 있고, 한국에는 자유무역협정 개정 카드를 내밀었다. 한국이 ‘가장 먼저 시험에 든 나라’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러시아는 국무장관 렉스 틸러슨(65), 중국 등 아시아는 상무장관 윌버 로스(80).’
올해 2월 트럼프 행정부의 초대 조각 내용이 발표되자 워싱턴 정가에서는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 출신으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분이 깊은 틸러슨 국무장관이 러시아와 유럽을 맡고, 월스트리트 출신인 로스 상무장관이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정책을 주도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세계 최대의 석유 회사 CEO 출신인 틸러슨 장관이 ‘밀실 협상의 귀재’라면 윌버 상무장관은 중국, 일본, 한국 등을 휘저으며 엄청난 부를 축적한 공격적인 투자자 출신이다.
로스 장관은 ‘금융 제국’ 로스차일드 가문이 운영하는 ‘NM 로스차일드 앤드 선’ 사장 출신으로 ‘파산 왕(King of Bankruptcy)’이란 별명이 붙어 있다.
자산담보부 채권(LBO·leveraged Buy-Out) 등 현란한 금융 기법을 동원해 파산 위기에 몰린 부실 기업을 저렴한 가격에 사들이고 구조조정을 통해 정상화한 다음 비싸게 되파는 사업으로 개인 자산이 21억달러(약 2조3000억원·2017년 6월 현재)나 된다.
1990년대 2억달러(약 2400억원) 상당의 로스차일드 펀드를 조성하는 등 로스차일드에서 24년 동안 일했고 63살이 되던 2000년 스스로 4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 대출을 일으켜 WL 로스 앤드 코 펀드를 창업했다.
로스 장관은 철강, 석탄, 섬유 등 주로 미국의 사양 산업 구조조정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미국 철강 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던 2002년 오하이오 LTV 코퍼레이션, 펜실베이니아 베들레헴 철강 등을 인수, ‘국제 철강 그룹’으로 통합한 뒤 구조조정을 통해 미탈 철장에 45억달러(약 5조원)를 받고 팔았다. 2004년에는 벌링턴 산업과 콘 밀을 합병, ‘국제 섬유 그룹’을 만든 뒤 2016년 플래티넘그룹에 매각했다. 도산한 미국 탄광들을 인수해 만든 ‘국제 석탄 그룹’을 2011년 34억달러(약 3조8000억원)에 매각했다.
‘차이나 커넥션’ 구설도
‘펜실베이니아 철강 산업을 구하자’며 지역 노동자들을 직접 설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레오 제라드 미국 철강노조 위원장은 “로스는 개방적이고 솔직하며 정직한 경영자다. 뛰어난 능력으로 수만 개의 미국 철강 산업 일자리를 보존했다”고 칭찬했을 정도다. 이 때문인지 올 2월 17일 상원 인준 투표에서 찬성 72표(반대 27표)를 얻는 등 초당적인 지지를 받았다. 노조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이 로스 장관에게 거는 기대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1980년대부터 친분을 쌓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서 운영하던 3개 카지노가 실적 부진으로 파산 위기에 몰리자 로스차일드 간부였던 로스 장관이 칼 아이칸과 함께 투자자들을 설득, 파산을 막아 줬다.
로스 장관은 미국의 대표적인 아시아통 인사로 꼽힌다.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지역 투자로 명성을 얻었고 정계와 관계, 고위층 인사들과 막역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직후 뉴욕에서 열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트럼프 당선자의 첫 회담을 성사시킨 막후 인물이었음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2010년 6월 이후 미국의 저팬소사이어티 회장을 맡고 있다.
2011년 중국 최대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 다이아몬드에 투자한 사실이 드러나는 등 중국과의 사업 관계가 많아 ‘차이나 커넥션’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중산(鐘山) 중국 상무부장은 지난 3월 “그는 과거 탁월한 기업인이었고 훌륭한 협상가”라며 윌버 로스 미국 상무부 장관을 한껏 치켜세웠다.
한라그룹 인수·매각해 큰 이익 김대중 정부때 표창도 받아

로스 장관은 1997년 한국의 외환 위기 당시 한국과 국제 채권단의 협상 자문과 중재역을 맡았다. 그가 이끄는 로스차일드 펀드는 한라그룹을 인수한 뒤 한라시멘트, 만도기계, 한라중공업, 한라엔지니어링 등으로 쪼개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외환위기 극복의 공로로 김대중 정부에서 표창까지 받았지만 약속한 외자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의 절반도 안 되는 돈만 유치하고 나머지는 한국 정부의 구조조정 기금으로 충당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 말기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됐던 리젠트그룹 지분을 인수했고, 차세대 영상이동전화(IMT-2000) 사업, 기아특수강 매각에도 관여했다. 동양생명과 공동으로 태평양생명을 인수하고 AIG컨소시엄을 꾸려 현대투신 인수를 시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