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배우 이시하라 사토미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대중의 관심은 열애 상대인 정보기술(IT) 벤처기업의 젊은 사장에게 쏠렸다. 일본의 아프리카TV로 비견되는 동영상 생중계 서비스 ‘쇼룸(SHOWROOM)’의 마에다 유지(前田裕二·31) 대표는 20대 중반에 IT기업 디엔에이(DeNA)에 입사 후 2013년 쇼룸을 설립했다. 2015년 그룹 자회사로 독립한 쇼룸은 일본 동영상 중계 사이트 매출 1위 서비스 기업이다. 일반인은 물론 ‘AKB48’ 등 인기 아이돌도 방송에 참여한다.
이전까지 일본에서 톱스타 여배우의 열애 상대는 비슷한 수준의 인기 연예인이나 고액 연봉의 스포츠 선수 정도였다.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으로 알려진 일본에서 부유층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은 재벌 가문의 후계자나 60·70대의 대기업 경영자에 그쳤다. 일본 상류사회의 벽은 부자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만큼이나 두꺼웠다.
마에다 대표에 이어 여배우 고리키 아야메와의 열애 보도로 화제가 된 온라인 쇼핑몰 ‘조조타운(ZOZOTOWN)’ 운영회사 스타트투데이의 마에자와 유사쿠(前澤友作·42) 사장은 2018년 ‘포브스’가 발표한 ‘일본의 부호 50인’ 순위에서 18위에 올랐다. 그는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의 작품을 123억엔(약 1230억원)에 사들이고, 전용 제트기와 수퍼카 브랜드 파가니의 ‘존다’를 타고 다닌다. 보유자산은 2889억엔(약 2조8890억원)으로 일본의 전통 부자가문인 모리가의 미망인 모리 요시코(森佳子·77) 모리미술관 이사장을 앞질렀다.
올해 일본의 부호 50인에는 마에자와 사장을 포함해 4명의 40대 IT업계 경영자가 이름을 올렸다. 소셜미디어서비스로 출발해 모바일 게임을 히트시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믹시의 가사하라 겐지(笠原健治·42, 자산 1605억엔), 사이버에이전트의 후지타 스스무(藤田晋·44, 1423억엔), 그리의 다나카 요시카즈(田中良和·41, 1252억엔) 등이다.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를 거머쥔 이들은 일본 ‘76세대’의 일원이다. 1976년을 전후해 태어난 이들은 대학 입학 무렵에 일본에서 급격히 보급된 인터넷을 활발하게 접했고, 윗세대와 비교해 이용자의 관점에서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이들이 19세가 된 1995년에는 PC 산업의 지각변동을 몰고 온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95’가, 1996년에는 웹브라우저 ‘넷스케이프 3.0’이 출시됐다. 1997년은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복귀한 해다. 1998년에는 구글이 설립됐다. 일본 IT 1세대를 손정의(61) 소프트뱅크 회장, 2세대를 미키타니 히로시(三木谷浩史·53) 라쿠텐 회장이라고 한다면 일본의 76세대들은 IT 3세대로 분류된다.
76세대의 대부(代父)로 평가받는 이는 2000년대 중반 일본의 ‘IT벤처 신화’를 이끌던 호리에 다카후미(堀江貴文·45)다. 손정의 회장의 중학교 후배이기도 한 그는 ‘호리에몽(호리에와 만화 캐릭터 도라에몽의 합성어)’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인터넷 기업 ‘라이브도어’의 성공으로 일본 재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힐스족(고급 주상복합단지 롯폰기힐스에 사무실을 내고 거주하는 신흥 부자)’의 원조인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며 야구단과 방송국 인수에 도전하고 정계를 엿보기도 했다.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던 호리에는 2006년 라이브도어의 분식회계 적발로 실형을 선고받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거침없는 행동과 말투로 일본 IT업계의 젊은이들에게는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기성세대들에게는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그였다.
호리에의 몰락으로 일본의 IT 벤처 붐은 주춤할 듯했지만, 76세대들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겸손과 인내를 배웠다. 사이버에이전트는 ‘라이브도어 사태를 잊지 말자’를 사훈(社訓)으로 내걸었다. 호리에와 함께 인터넷 옥션 사업에 도전했던 믹시의 가사하라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 외국계 SNS의 상륙으로 위기에 몰렸지만 모바일 게임 등 신사업 발굴로 눈을 돌려, 재기에 성공했다. 회장으로 있으면서도 공원에서 전단을 돌렸다.
세대교체 한창인 한·일 IT업계
일본 재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젊은 IT 부호들의 활약이 인상적인 까닭은 이전 세대로부터의 매끄러운 바통 터치에 있다. 쇼룸의 마에다 대표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기업가 난바 도모코(南場智) DeNA 회장이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인물이다. 그리의 다나카 대표는 소니를 11개월 만에 그만두고 라쿠텐의 사원 번호 77번으로 입사한 뒤 독립했다.
손정의 회장은 교육기관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를 설립하고 후계자 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사이버에이전트, 그리 등 일본의 신흥 ‘메가 벤처’ 출신은 도처에서 창업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76세대의 활약은 얼핏 미국의 ‘페이팔 마피아’를 떠올리게 한다. 전자상거래 기업 페이팔의 창업 멤버들은 연쇄 창업으로 실리콘밸리의 신화를 썼다. 피터 틸은 마크 저커버그에게 초기 비용을 투자해 페이스북의 토대를 제공했고,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와 스페이스X를 창업해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을 쓰고 있다. 유튜브를 창업한 스티브 챈과 채드 헐리,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500스타트업의 데이브 맥클루어도 페이팔 출신이다.
최근에는 76세대의 뒤를 이을 30대 기업가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에다 쇼룸 대표를 비롯해 ‘포브스’가 ‘일본을 구할 기업 10’으로 선정한 IT기업 메탑스의 사토 카즈아키(32·佐藤航陽) 사장, 최근 IT 전문가로 주목받는 오치아이 요이치(31·落合陽一) 쓰쿠바대 학장 보좌 겸 픽시더스트테크놀로지 대표 등이다. 76세대가 인터넷의 파도를 탄 세대라면, 이들은 모바일과 소셜미디어의 확장을 지켜봤다.
한국에서도 ‘IT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이해진·김범수·김정주·김택진 등 50대 IT 리더의 존재감이 여전한 가운데, 40대로는 인기 온라인 게임 ‘배틀그라운드’로 유명한 장병규 블루홀 의장, ‘배달의 민족’의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 권혁빈 스마일게이트 대표가 뒤를 잇고 있다. 쿠팡, 위메프, 티켓몬스터 등 한국 소셜커머스 3사는 모두 30대가 수장을 맡고 있다.
IT를 발판으로 한국과 일본의 재계를 이끌 이들은 향후 어떤 승부를 펼치고 또 손을 맞잡게 될까. 그 모습은 아마도 삼성전자와 소니, 현대자동차와 도요타자동차처럼 생존을 두고 치열하게 맞붙던 제조업계의 전통적인 경쟁구도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이미 IT업계에서는 한·일 간 투자 협력과 인적 교류가 활발하다. ‘미래지향적 협력’이란 바로 이런 데 쓰여야 할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