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기회의 평등을 위한 투자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투자다.”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76) 블룸버그 회장이 11월 18일(현지시각) 모교인 존스홉킨스대에 저소득층, 중산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재원으로 18억달러(2조400억원)를 기부했다. 미국 대학 기부 역사상 최대 금액이다.
블룸버그 회장은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한 해 6000달러도 벌지 못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국가 장학금, 학자금 대출, 근로장학금으로 존스홉킨스대를 졸업했다”며 “대학 졸업장이 내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준 덕분에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주머니 사정에 따라 대학 입학이 결정되면 가난이 대물림된다”며 “기회의 문을 넓히기 위해 범정부 차원의 대응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회장의 이번 기부는 미국 대학의 학생 선발과 장학금 제도 개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현재 미국 대학 대부분은 학생들이 부담할 수 있는 학비 이외의 비용을 대학이 지급하는 ‘니드-베이스드(Need-based·학비 부담 능력에 기반한 학생 선발)’ 방식으로 학생을 뽑고 장학금을 지급한다. 한정된 재원을 이유로 대학들이 장학금 수요가 많은 저소득층 학생보다 중산층, 부유층 출신 학생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부자들을 위한 입시 제도’란 비난을 받고 있다. 반면 ‘니드-블라인드(Need-blind·학비 부담 능력과 무관한 학생선발)’ 입시는 실력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고 형편에 따라 장학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나 대학의 재정 부담이 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7개 대학만 채택하고 있다. 존스홉킨스대도 2013년 니드-블라인드 제도를 도입기로 결정했으나 재원 부족으로 발표를 미루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널드 데이비스 존스홉킨스대 총장은 “대학 설립자인 존스 홉킨스의 기부금 700만달러와 맞먹는 금액”이라며 “당장 올해 입시부터 니드-블라인드 방식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 회장의 기부에 대해 차기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둔 결정이란 삐딱한 시선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가 대학 졸업 직후 5달러 기부를 시작으로 존스홉킨스대 기부 누적액이 1억5000만달러(약 1700억원)나 되고 전체 기부 금액이 64억달러(약 7조2400억원)에 달하는 점을 들어 ‘철학의 실천’이라 보는 시선이 강하다.
월스트리트 고급 정보 시장 개척
‘세계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억만장자(포브스)’로 불리는 블룸버그 회장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존스홉킨스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살로먼 브라더스 파트너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지만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블룸버그 회장의 오늘이 있게 한 결정적 계기는 37년 전 날벼락 같은 해고 통지였다.
“여기 1000만달러가 있네, 자네 시대는 끝났어.” 월스트리트 투자회사 살로먼 브라더스에 입사(1966년)해 6년 만에 파트너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그는 1981년 8월 1일 토요일 아침, 존 굿프렌드 사장의 해고 통지를 받았다. 인수·합병 과정에서 벌어진 지저분한 사내 암투의 희생양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이었다.
블룸버그 회장은 해고된 이튿날 블룸버그 통신을 창업했다. 투자 시장의 정보 비대칭 상황에서 월스트리트가 느끼는 ‘고급 정보 갈증’을 꿰뚫어 본 그는 탄탄한 인맥을 동원해 고급 정보 시장을 공략했다.
전용 단말기와 독점 회선을 이용한 실시간 정보 제공, 풍부한 데이터베이스와 그래픽 기반의 화려하고 심층적인 고급 정보 서비스가 시작되자 월스트리트가 곧 반응했다. 창업 1년 만에 메릴린치가 뉴스 터미널 22개 설치 대가로 3000만달러를 지불키로 하고 지분 투자까지 했다. 블룸버그 뉴스 터미널이 전 세계에 32만여 대 보급되는 동안 블룸버그는 케이블TV, 통신, 잡지, 라디오, 인터넷 미디어를 아우르는 멀티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룹 매출은 90억달러(2014년), 기업 가치는 350억달러를 웃돈다. 블룸버그는 월스트리트에 상장하지 않은 유한 회사로 남아 있고 주식 88%가 블룸버그 회장 소유다.
월스트리트에서 쫓겨난 뒤 미디어 제국을 건설한 블룸버그 회장의 다음 도전은 뉴욕 시장이었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1주일 뒤 실시된 공화당 시장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뒤 2001년, 2005년, 2009년 시장 선거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첫 임기 때는 공공 교육 개혁, 두 번째 임기 때는 빈곤 퇴치, 시장 임기 규정(3선 금지)을 바꾸고 출마한 세 번째 선거에서는 금융 위기 극복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막대한 선거자금(첫 선거 7300만달러·재선 7800만달러)은 개인 돈으로 충당했고 시 재정 건전성 회복을 외치며 월급은 1달러만 받았다. 관사 대신 개인 저택에서 살면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했다.
양당 정치 초월한 중도 정치인
그는 평생 민주당원으로 진보주의자를 자처했지만 정작 공화당 후보로 두 번이나 뉴욕 시장에 당선됐고 두 번째 임기 중 공화당을 탈당(2007년)했으며 세 번째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철새 정치인·기회주의자란 비난이 나올 법도 하지만 중요 정책에 대한 그의 일관된 입장 덕분에 민주·공화당 양당 정치의 경계를 넘나들며 초당적 행보를 걷는 중도 성향 정치인이란 시각이 더 많다.
낙태 찬성, 동성결혼 허용, 총기 규제 강화, 엄격한 환경 규제, 이민자 적극 수용, 사형 반대 등에서는 민주당과 같은 입장이지만, 이라크 철군 반대, 부시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 지지, 패트리어트법 찬성, 자유무역 지지, 친기업 정책, 증세 반대, 균형 재정 등에서는 공화당과 같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민감한 세금 문제에 대해서는 ‘회계상 보수주의자’를 자처한다. 60억달러에 달하는 뉴욕시의 재정 적자를 30억달러 흑자로 돌려놓겠다고 공약한 그는 당선된 뒤 “공공 서비스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비용을 내야 한다. 세금은 필요악”이라며 세금을 인상했다. 동시에 방만한 행정 조직 정비에 나섰고, 재정 상태가 좋아지자 감세 정책으로 전환했다.
블룸버그 회장은 올 9월 민주당에 다시 입당했고 중간 선거 승리를 위해 1억달러 이상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보다 돈을 더 많이 번 자수성가한 억만장자 기업인이자 행정 경험 또한 풍부한 그는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유력한 대권주자로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 업그레이드 버전” 대선 출마 관심 집중
블룸버그 회장은 1942년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시 외곽 브라이턴에서 태어났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아버지(헨리 블룸버그)는 농장 회계원이었고 어머니(샬럿 루벤스 블룸버그)는 벨라루스 출신 이민자의 딸이었다. 블룸버그 회장은 아르바이트하던 전자회사 사장이 추천서를 써준 덕분에 존스홉킨스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블룸버그 재단을 통해 공공 의료, 예술, 정부 혁신, 환경, 교육 등에 대한 기부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10년(3억3200만달러), 2011년(3억1100만달러), 2015년(5억1000만달러) 등 누적 기부액이 64억달러에 달한다.
1975년 영국 출신인 수잔 엘리자베스 바버라 브라운과 결혼, 두 딸을 뒀다. 1993년 이혼하고 2000년 이후 뉴욕주 은행 감독관 출신 다이애나 테일러와 동거하고 있다.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증을 가지고 헬기를 직접 조종하며, 아마추어 무선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개인 재산 510억달러(‘포브스’ 추정, 2018년 6월 현재)로 ‘세계 억만장자 순위 11위’에 올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