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요 경쟁 섹션인 ‘뉴 커런츠- 한국 영화’ 상영작으로 선정된 김보라 감독의 ‘벌새’. 사진 김보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요 경쟁 섹션인 ‘뉴 커런츠- 한국 영화’ 상영작으로 선정된 김보라 감독의 ‘벌새’. 사진 김보라

“하루에 자위 두 번 한 적 있어요?” “오늘 밤 오빠랑 자는 건 불가능하겠죠?” 1990년생 영화감독 정가영의 ‘밤치기’는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노골적으로 들이대다 처참하게 차이는 여자의 이야기다. 극장에서 예고편을 보다 웃음이 터졌다. 이토록 발칙한 여성 캐릭터를 본 적이 있던가. 새 영화의 자료 조사를 핑계로 술자리에서 한 번 본 남자에게 두 번째 만남을 신청한 여자는 여느 영화 속의 관능적이거나 청순가련한 여자 주인공과는 다르다.

일단 외모부터 그렇다.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다소 통통한 몸매는 지극히 평범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시종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등장하는 것도 신선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민망한 질문과 서툴고 투박한 구애의 몸짓은 또 어떻고. 주연을 맡은 배우는 정가영 감독 본인이다. 단편 ‘혀의 미래’ ‘내가 어때섷ㅎㅎ(오탈자가 아니라 실제 제목이 이렇다)’부터 첫 장편 ‘비치온더비치’에 이르기까지 정가영은 매번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감독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이 여자 주인공들은 홍상수 영화 속 지질한 남자 주인공들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방만한 성적 욕망을 드러내며 19금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일까. 한동안 남자들만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던 영화계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여성 감독의 영화를 개막작(신수원의 ‘유리정원’)과 폐막작(실비아 창의 ‘상애상친’)으로 선정했다면, 올해의 화제는 여성 영화의 약진이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많이 늘어나면서 이례적으로 두 명의 여배우(이주영·최희서)가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요 경쟁 섹션인 ‘뉴 커런츠- 한국 영화’ 상영작으로 김보라 감독의 ‘벌새’와 박영주 감독의 ‘선희와 슬기’가 선정됐고, 최근 한국 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는 ‘한국 영화 오늘-비전’의 상영작 중 절반(‘아워바디’ ‘영주’ ‘메기’ ‘보희와 녹양’ ‘영하의 바람’)이 여성 감독의 영화였다. 이 영화들은 11월 29일부터 12월 7일까지 CGV아트하우스 압구정, 인디스페이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다.

이 같은 흐름과 맞물려 여성 감독을 조명하는 특별전도 이어졌다. 인디스페이스는 개관 11주년을 맞아 기획전 ‘I-독립영화 여성 감독전’을 개최해 자신만의 화법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동시대 여성 감독 14인의 작품을 선보였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전’이 열리고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을 비롯, 최초의 여성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인 홍은원(1922~1999), 배우로도 유명했던 최은희(1926~2018),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의 제작자이자 뛰어난 영상미로 주목받은 황혜미(1936~), ‘수렁에서 건진 내 딸’로 감독 데뷔하며 1980년대 한국 상업영화계에서 성공을 거둔 이미례(1957~),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리틀 포레스트’ 등으로 사랑받고 있는 임순례(1960~)가 그 주인공이다.


(왼쪽) 정가영 감독의 첫 장편영화 ‘비치온더비치’의 포스터. 사진 로카픽처스 (오른쪽) 올해 부국제 ‘한국 영화 오늘-비전’ 상영작이었던 차성덕 감독의 ‘영주’. 사진 CGV아트하우스
(왼쪽) 정가영 감독의 첫 장편영화 ‘비치온더비치’의 포스터. 사진 로카픽처스
(오른쪽) 올해 부국제 ‘한국 영화 오늘-비전’ 상영작이었던 차성덕 감독의 ‘영주’. 사진 CGV아트하우스

여성 감독이 그리는 색다른 여성 이야기

관객 입장에서는 다양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생겼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암흑가 사나이들의 의리와 배신, 야망에 불타는 남자의 성공과 추락, 철없는 아저씨들의 일탈 같은 건 이미 충분히 봐오지 않았던가. 소년의 성장담은 있어도 소녀의 이야기는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다. 한국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대부분 여성의 모습은 남자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미스테리한 ‘팜므파탈’이거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결한 피해자였다.

여성 감독들의 등장이 반가운 건 이 때문이다. 남성 감독이 일부러 남성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지만 여성 감독은 자연스럽게 여성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진 않는다. 그들에겐 여성의 삶이 친숙한 탓이다. 여기엔 연애 말고도 생각할 게 많은 청춘이 있고, 아내가 아닌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여성이 있다. 당찬 소녀와 엉뚱한 아가씨, 용감한 아줌마, 아름다운 할머니들이 만들어가는 연대와 일상이 마침내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들은 꽤 재미있다.

최근 관객의 입소문으로 흥행 중인 ‘미쓰백’의 이지원 감독은 제작보고회에서 “여성 영화가 많지 않은 한국 영화계에서 조금 더 (여성 영화의) 영역이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여성 감독들을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만 묶어버리는 건 또 다른 편견일 수 있다. 올 한 해 문화계를 휩쓴 미투 운동(me too·과거 성적 가해자 고발 운동)의 여파로 치부하는 건 지금까지 언급한 이 영화들의 영화적 성과를 무시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영화를 말하는 건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계뿐만 아니라 미술계에서도 여성 작가의 활약이 눈에 띈 한 해였다. 주목할 만한 개인전뿐 아니라 현재 복합문화공간 ‘탈영역 우정국(서울 마포구 창전동)’ ‘대안공간 루프(마포구 서교동)’ 등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역시 여성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거나 여성 작가들만으로 전시를 꾸렸다. 국내 미술계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올해의 작가상 2018’ 역시 여성 작가에게 돌아갔다. 수상자인 정은영은 에세이 필름과 다큐멘터리, 공연 등의 방법을 통해 오랜 시간 여성 국극(國劇·한 나라 특유의 국민성을 나타낸 연극)의 발자취를 쫓아왔다. 그는 한국 근대사에서 여성 국극이 잊힌 역사로 남기 전에 공연 기록 영상과 기록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여성이 영화를 꿈꾸는 것 자체가 금기였던 시절, 그 금기를 깬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된 박남옥 감독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 우리나라 여성 영화인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세계에 진출하는 것도 보고 싶다.” 1980·1990년대생 여성 감독들이 대거 등장하고, 그들의 첫 장편이 호평받았다고 해서 당장 많은 기회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스크린 앞에 앉은 우리는 그저 팝콘을 먹으며 즐기기만 하면 된다. 밤하늘을 힘껏 뛰어 ‘밤치기’를 하는 여성 영화인의 영화를 향한 힘겨운 구애가 오늘은 꼭 성공하기를 바라며.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