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1980년대 일본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의 3분의 2가 일본 기업으로 채워졌고 도쿄의 부동산 시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격히 올랐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의 저서 ‘세계 최고 일본(Japan As Number One)’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전 세계는 일본이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세계의 패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1987년 일본 최대 통신회사인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NTT)의 주식시장 상장은 일본 버블경제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공모청약에 막대한 투자액이 몰리며 1주당 120만엔(약 1200만원)이라는 고액에 상장된 NTT의 주가는 2년이 채 되지 않아 400만엔(약 4000만원)을 돌파했다. NTT의 시가총액이 한때 서독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식회사 일본’의 화려한 전성기는 거짓말처럼 끝났다. 1985년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영국 등 G5 재무장관들이 달러화 강세(엔화 약세)를 시정하기로 결의한 ‘플라자 합의’가 일본 경제에 찬물을 끼얹었다. 달러화 가치가 엔화 가치보다 높아 일본 제품이 미국에 싼 가격으로 수출될 수 있었던 환경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소비세를 신설하고 금리를 올리자 일본 경제를 견인하던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 경제의 전성기는 거품처럼 사그라졌다. ‘잃어버린 10년’, 일본 장기 불황의 시작이었다.

최근 일본 정부의 경제정책과 기업들의 성장 전략은 당시의 버블경제를 떠올리게 한다. 저금리와 양적완화(중앙은행이 통화를 시중에 직접 공급해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를 통한 경기부양책인 ‘아베노믹스’는 완전한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임시방편에 가까웠다. 아베노믹스의 경기부양책은 먼저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기업이 잘돼 채용이 늘고 급여가 오르면 자연스레 경기가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었다.

결과는 계획과 다소 달랐다. 일자리는 늘어났지만 임금은 여전히 낮았다. 기업들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일손이 부족해지자 채용을 늘렸지만 임금은 올리지 않고 수출에서 얻은 이익을 주로 설비나 기술 투자로 돌렸다.

일본 정부는 아베노믹스가 도입된 2012년 12월 이후 경기동행지수(현재의 경기 상태와 방향을 파악하고 예측하기 위한 경기종합지수의 하나) 등을 토대로 줄곧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달 들어 제2차세계대전 후 최장기의 경기 회복 기간(2002년 2월~2008년 2월의 6년 1개월)과 같은 기록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2019년 1월이면 기록은 경신된다.

그런데 일본 사회는 경기가 나아졌다는 것을 거의 실감하지 못한다. 수치로도 드러난다. 아베노믹스 이후 국내총생산은 연평균 1.2%씩 성장한 반면, 개인 소비는 연 0.4%씩 늘어나는 데 그쳤다. 물가 상승이 겹치며 실질 임금은 오히려 매년 0.5%씩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리먼 사태에서 드러났듯, 시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경기 회복은 너무나 취약하고 찰나의 충격에도 무너지기 십상이다. 일본 경제학자들이 “소득 수준을 높여 개인 소비가 주도하는 경기 회복을 실현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최근 일본 경제의 기형적인 성장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는 분야는 단연 IT업계다. 이들은 통신사업이나 전자상거래로 출발해 금융, 가상화폐 등 다방면으로 진출하며 공격적인 자금조달로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성장전략을 취하고 있다.


19일 오전 일본 도쿄의 주가지수 전광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전광판 좌측 하단에 이날 상장된 일본 최대 IT기업 소프트뱅크의 주가가 게시돼 있다. 사진 AFP 연합
19일 오전 일본 도쿄의 주가지수 전광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전광판 좌측 하단에 이날 상장된 일본 최대 IT기업 소프트뱅크의 주가가 게시돼 있다. 사진 AFP 연합

기업들의 위태로운 연금술

지난 수년간 미국 스프린트(이동통신사), 영국 ARM(반도체기업) 등 대규모 인수·합병(M&A)을 잇달아 성사시킨 소프트뱅크그룹은 19일 도쿄 증권거래소에 자회사 소프트뱅크를 상장했다. 소프트뱅크그룹은 그동안 일본 증시에 상장돼 있었지만 통신 자회사인 ‘소프트뱅크’를 이날 별도 상장했다.

시가총액은 7조1800억엔(약 71조원)에 달한다. 기업공개(IPO)를 통한 조달액은 2조6500억엔(약 26조5500억원). 1987년 2조2000억엔(약 22조420억원)을 조달한 NTT를 넘어 일본 증시 사상 최대 규모다. 세계적으로도 2014년 알리바바의 뉴욕증시 상장(250억달러 조달‧약 28조1750억원)에 이어 두 번째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돈을 끌어모았지만 13조엔(약 130조2480억원)에 달하는 소프트뱅크그룹의 부채를 감안하면 자금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소프트뱅크그룹은 현재 일본을 통틀어 채무비율이 가장 높은 기업이다. 이자만 연간 5000억엔(약 5조원)을 낸다. 소프트뱅크는 최근에 자회사인 야후재팬과 합작해 캐시리스(cashless·현금 없는) 결제 서비스인 ‘페이페이’를 선보였다. 이 분야 후발주자로서 가입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100억엔(약 1000억원)이라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캐시백 이벤트도 열었다. 페이페이로 지불한 금액의 20%를 무조건 돌려주는 캠페인(1인당 상한액 25만엔·약 250만원)으로 열흘 만에 19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했다. 내년 3월까지 예정이던 캠페인은 ‘페이페이 대란’으로 환급액이 소진돼 열흘 만에 조기 종료했다. 이용자들에게 환원된 금액은 모두 전자화폐다.

또 다른 일본 IT 대기업인 라쿠텐은 소프트뱅크처럼 적극적으로 해외 기업 인수에 나서지는 않고 있지만, 1조엔(약 10조원)이 넘는 부채를 안고 있다. 이 회사는 자사 신용카드를 발급하면 기본 5000엔(약 5만원), 이벤트 기간에는 7000엔(약 7만원)어치의 ‘라쿠텐 수퍼 포인트’를 제공한다. 전자상거래 사이트인 ‘라쿠텐 이치바(市場)’나 통신사 ‘라쿠텐 모바일’ 등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고 사용 금액만큼 적립도 받는다. 라쿠텐이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발급한 포인트는 1조엔(약 10조원)을 넘어섰다. ‘라쿠텐 생태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전자화폐다. 이 같은 포인트 발급비용에 대해 일각에서는 국제회계기준(IFRS)에 부합하지 않는 ‘미래의 시한폭탄’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라쿠텐은 이 포인트를 자사의 암호화폐인 ‘라쿠텐 코인’으로 전환하는 방침을 검토 중이다.

이처럼 소프트뱅크와 라쿠텐은 대규모 자금조달로 세(勢)를 불려가는 한편, 고객 확보를 위해 사실상 독자적으로 발행하는 가상화폐와도 같은 포인트를 뿌려댔다. 채무는 나날이 늘어만 가고 있다.

그런데 과거 버블붕괴 직전과 같이 일본이 금리 인상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소프트뱅크는 금리가 1%만 올라도 연간 1000억엔(약 1조원)의 이자 부담이 더해진다. 1억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이용자들이 일제히 포인트를 소비하기 시작하면 라쿠텐은 버텨낼 수 있을까. 이들의 아슬아슬한 성장 전략은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주도해 온 지난 수년간 일본의 경기 회복과 맥을 함께한다. ‘일단 키워놓고 보자’는 식의 팽창을 지켜보며 식은땀이 나는 것은 무지한 이방인의 오지랖에 불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