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님, 반갑습니다. 거북이님도 방가방가(반갑다는 뜻).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요…. ”
인터넷 방송국 아프리카 TV의 채널 같지만, 라디오 방송이다. 일반인 DJ가 영상 없이 목소리만으로 방송을 진행한다. 실시간으로 채팅을 하면서 청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영락없는 라디오 방송 같다.
‘짜파게티 먹는 중’이라고 쓰여 있는 다른 방송 채널에 들어갔다. 면을 비벼 후루룩 먹는 소리가 날것 그대로 들린다. 마이크 가까이에 입을 대고 쫄깃한 젤리나 바삭한 크래커를 씹는 소리를 내는 음식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상 소음) 방송이다. 실시간으로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청취자만 100명이 넘었다.
세상에 없는 획기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지고 나와 새 시장을 창조하는 것만이 스타트업(초기 창업 벤처)의 성공 모델은 아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1위 기업의 사업 모델을 살짝만 비틀어 성공가도를 걷고 있는 서비스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10~20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애플리케이션 ‘스푼라디오’다. 일반인 DJ들이 채팅방처럼 라디오 채널을 열면 청취자들이 접속해 방송으로 소통하는 서비스다. 이 앱을 이용하면 누구나 개인 라디오 방송 DJ가 될 수 있다. 영상이 아닌 음성 서비스만 제공하고 있어서 개인이 더 쉽게 채널을 열 수 있다. 라디오계의 유튜브이자 아프리카 TV다.
언뜻 들으면 유튜브에서 영상만 없앤 간단한 서비스 같지만, 성장 기세가 무섭다. 지난해 누적 다운로드 수가 570만 건을 돌파했다. 같은 기간 월 순수 방문자(MAU) 수도 출시 2년 만에 25배 가까이 증가한 124만 명을 기록했다. 지금도 하룻밤에 라디오 방송이 2만6000개씩 개설된다. 잠재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7월 KB인베스트먼트,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굿워터캐피털 등 한·미·일 3개국 투자사로부터 190억원을 투자받았다.
개인 라디오 방송이라는 새로우면서도 새롭지 않은 콘셉트에 반응한 이는 10~20대다. 기존에 인터넷 라디오 팟캐스트 서비스가 있었지만, 정치·시사 관련 콘텐츠에 편중됐다는 점이 달랐다. 놀이 개념으로 접근한 서비스는 처음이다. 실제로 이용자의 70% 이상이 ‘Z세대’로 불리는 18~24세 젊은이다. 1995~2005년에 태어난 이들은 각종 SNS 플랫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용자들은 이 플랫폼에서 마음껏 뛰논다. 거리낌 없이 방송을 열고 스스로 콘텐츠를 만든다. 마음에 드는 DJ에게는 도네이션(후원) 시스템을 통해 한 번에 1000원에서 최대 33만원어치 사이버머니 ‘스푼’을 보낼 수 있다. 작년 매출 230억원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전년(24억원)보다 9배 넘게 증가한 수준이다.
스푼라디오처럼 발상 전환을 통해 이용자 마음을 사로잡은 스타트업 서비스가 또 있다. 중고 거래 앱 ‘당근마켓’이다. 네이버에 ‘중고나라’라는 독보적인 온라인 중고 장터가 있었지만, 당근마켓은 이 모델의 약점을 보완해 성공한 경우다.
‘이웃사촌끼리’ 중고 거래로 신뢰 잡아
‘당신 근처의 마켓’의 줄임말인 당근마켓은 최대 6㎞ 내의 이용자끼리만 거래할 수 있다. 이 경계를 넘어선 다른 동네 사람이 올리는 상품은 조회가 불가능하다. ‘이웃사촌 간의 중고 거래’라는 사업 모델이다. 기존의 중고 거래가 이용자 간 거리와 관계없이 진행돼 사기 발생 가능성이 커지는 구조였다면, 당근마켓은 거리에 제한을 두면서 ‘신뢰성’을 추가했다.
여기에 ‘사기 방지 자동화 프로그램’이라는 기술도 추가했다. 게시물마다 가품 여부를 놓고 투표가 진행되는데, 일정 기준 이상의 표를 얻으면 해당 게시물은 자동으로 가려진다. 이 횟수가 많은 이용자의 등급은 자동으로 떨어지고, 게시글 노출 순위도 내려간다.
시장 반응도 뜨겁다. 서비스 출시 3년 만인 2월 기준 누적 다운로드는 500만 건, 월 순수 방문자 수(MAU)는 200만 명을 넘어섰다. 또 덩치 큰 전자상거래 앱을 제치고 이용자 체류 시간이 가장 긴 앱으로 꼽히기도 했다. 디지털 광고 업체 인크로스에 따르면 2018년 12월 기준 당근마켓 이용자 평균 체류 시간은 264분으로 쿠팡(78분), 11번가(75분)를 크게 웃돌았다. 평균 앱 실행 횟수도 같은 기간 809회를 기록하며 위메프(758회), 티몬(652.6회)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여행 상품 중개 서비스를 운영하는 ‘마이리얼트립’ 서비스도 인기다. 기존에 있던 여행사의 상품을 뛰어넘어 현지에서 이용할 수 있는 이색적인 여행 상품을 제공한다. 독일 베를린으로 떠나는 여행자가 현지에서 미술사를 공부 중인 대학원생이 올린 ‘베를린 박물관 투어’ 상품을 5만원에 예약하는 식이다. 지난해 거래액은 1300억원, 1월 거래액은 22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올 초엔 국내 투자사로부터 17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받기도 했다.
[Interview] 최혁재 마이쿤 대표
“나 빼고 다 웃는 광고 회의…데이터와 피드백으로 Z세대 저격했죠”
“솔직히 저도 우리 방송들이 재미가 없어요. 처음에는 이용자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어울려 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이제는 인정했습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데이터로만 경영 판단을 하기로요.”
Z세대가 열광하는 스푼라디오 창립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서비스 이용자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니 말이다. 3월 6일 서울 강남역에 있는 마이쿤 사무실에서 만난 최혁재 대표는 담담하게 개발 과정을 설명했다. 마이쿤은 스푼라디오 서비스를 만든 회사다.
1979년생인 최 대표는 “나를 포함해 30~40대가 대부분인 벤처캐피털(VC) 관계자들이 처음엔 우리 서비스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면서 “지금은 나부터 사용 패턴, 청취율, 청취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데이터 기반 의사 결정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최 대표가 Z세대 취향을 겨냥해 개인 라디오 방송 서비스를 들고 나온 것은 아니다. 그는 2012년 대기업 개발자를 그만두고 나와 홍대 앞 길거리에서 스마트폰 배터리 공유 사업 ‘만땅’을 시작한 7년 차 베테랑 창업가다. 서비스가 인기를 얻으면서 VC에서 초기 투자를 받고 실리콘밸리 연수도 다녀오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배터리를 일체형으로 바꾸면서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도전으로 콘텐츠 사업을 시작한 것이 2015년 말. 초창기 회사에서 내놓은 서비스는 이용자들이 음성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받는 형태였다. 하지만 일부 이용자들이 라디오 형식의 방송 클립을 올렸고, 오히려 이것이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여기에 착안한 경영진은 이용자들인 Z세대의 피드백을 받아가며 서비스를 변형해나갔다. 초기 1년 동안에만 총 54차례, 매주 한 번꼴로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한 결과 Z세대의 취향에 꼭 맞는 서비스가 탄생했다.
경영진에게 부족한 ‘Z세대 마인드’는 젊은 직원들이 대신한다. 70명에 달하는 직원 중 40% 정도가 주 이용층인 20대다. 최 대표는 마케팅팀에서 만들어오는 온라인 광고 시안을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광고 지표나 클릭률로 보이는 성과는 월등하다. 그는 “20대 초중반 직원들이 광고를 보고 배를 잡고 웃는데, 나 혼자 웃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다”며 웃었다.
향후 서비스 방향도 이용자들과 함께 만들어나갈 생각이다. 최 대표는 “이용자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며 “이용자와 함께 생태계를 만들어 가면서 장기적으로는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