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러시아 같은 대륙 국가는 지상군의 역할이 크고 영국 같은 해양 국가는 해군이 중요하므로 군사 전략상 해당 분야에 대한 투자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아베 정권 수립 후 전쟁 가능한 보통 국가를 지향하는 일본도 해상자위대는 재래식 전력으로만 따지면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강력하지만 육상자위대는 상당히 미약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제국주의 국가 반열에 오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 이때 육군은 침략의 선봉에서 활약했지만 약체인 중국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렸고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기습의 이점을 누려 연전연승했을 뿐이다. 장비, 전술 능력이 당시 주요 열강들에 비해 뒤졌다.
예를 들어 미국의 M4 전차는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밥이었던 반면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군의 저승사자로 군림했을 정도였다. 전쟁에서 패하며 철저하게 몰락한 일본의 지상군은 냉전을 틈타 9년 만에 육상자위대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으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상자위대와 달리 군국주의 시절 육군보다 전력이 약하다.
명분상 육상자위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가상 적군의 상륙 저지다. 관할 지역에 비해 규모가 작아 기동력이 뛰어난 기갑부대를 요지에 배치해 놓고 있다가 적이 상륙하면 신속 전개해서 막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다. 가상 적국이 바다를 건너와 일거에 상륙시킬 수 있는 전력이 제한되므로 1~2개 기갑사단 정도면 충분히 대적이 가능하다.
이때 전력의 핵심은 전차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발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경제력과 자신들의 기술력을 믿고 자위대 창설 직후인 1955년부터 국산 전차 개발에 나섰다. 그렇게 미쓰비시 중공업이 만들어 1961년부터 배치된 전후 일본 최초의 전차가 61식 전차다. 하지만 자위대 내부에서 온갖 불만이 쏟아졌을 만큼 성능이 최악이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전차를 만들었으나 정작 일선에서 있으나 마나 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만큼 원천 기술력이 형편없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였다. 61식은 대세가 된 파워팩 대신 1930년대 전차처럼 엔진과 변속기를 별도로 장착해 정비가 어려웠고 볼트식 접합 방법으로 차체를 만들어 방어력도 형편없었다.
적시에 등장해야 성공한다
개발 당시에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미국의 M47 전차였는데 단지 모양이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성능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M47도 미국에서는 실패작이라 보고 2년 만에 생산을 종료한 후 M48 전차 양산에 돌입한 상태였다. 한마디로 61식은 시대에 뒤진 기준을 가지고 과거 기술로 개발된 전차였다.
1960년대는 T-62, M60, 레오파르트1 같은 제2세대 전차들이 속속 배치되기 시작한 시기였으므로 만일 제1세대 전차인 61식이 10년 정도 빠른 1950년대에 등장했다면 최악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을지 모른다. 본격 활약해야 할 미래 시점이 아니라 국산이라는 도그마에만 매몰돼 안이하게 개발한 결과였다.
결국 1962년부터 후속 전차에 대한 개념 연구를 시작했다.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기에 미쓰비시는 일선 배치 시기를 70년대 중반 이후로 상정하고 당시에 활약 중인 최신 전차들을 면밀히 검토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후계자가 바로 일본의 제2세대 전차인 74식 전차로 1975년부터 본격 양산돼 배치가 이뤄졌다.
이미 제2세대 전차가 대세가 된 시점이어서 61식의 실패를 교훈 삼아 74식은 배치 시점을 고려해 경쟁자들보다 앞선 기술을 적용하려 했다. 이 때문에 74식은 동종 전차에 비해 등장은 10년 정도 늦었지만 현재 최신 전차들이 채택하는 유기압식 현가장치, 레이저 거리측정기 등을 앞서 장착해 제2.5세대 전차로 분류된다.
KT에서 서비스 시작 2년 만인 1999년에 사업을 종료한 시티폰도 61식 전차와 같은 경우다. 제한된 구역에서 발신만 할 수 있는 변형된 공중전화에 불과한 시티폰이 휴대전화와 PCS(개인휴대통신)가 본격 대중화되던 시기에 성공할 가능성은 없었다. 만일 10년만 먼저 서비스를 시작했다면 유선전화에서 이동전화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훌륭히 담당했을 것이다.
결국 무기도 상품도 시기를 놓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안정화됐다고 변화를 거부하며 과거의 기술에 안주하지 말아야 하고 ‘달에 신도시 건설’처럼 조만간 실현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큰 목표에 집착해서도 곤란하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의 성능을 발휘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놓는 것도 성공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