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아들, 왕자님도 부족한 게 있을까. 동화 속 왕자는 모두 잘생겼고, 괴물과 싸워 이겨 세상을 구할 만큼 지혜롭고 용감하며,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산다는 해피엔딩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영국의 둘째 왕자 버티(조지 6세)에겐 세상과 마주해야 하는 매 순간이 고통이다.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왕족이라는 지위가 부담일 수밖에 없었던 건, 그에게 말을 더듬는 장애가 있기 때문이었다.
말더듬이 왕자라니. 키스 한 번으로 멋진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개구리 왕자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버티는 권위 있다는 전문가들에게 가히 고문이라고 할 만한 치료까지 받아보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다. 치유되길 바라는 주변 사람의 기대가 커질수록 증상은 더 심해질 뿐이다. “허리 펴고! 긴장 풀고!”라는 아버지의 격려까지 더해지면 입은 아예 떨어지지도 않는다.
버티는 자신의 마음고생을 너무 잘 이해하는 아내가 찾아낸 마지막 희망, 호주 출신의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만난다. 그런데 자기 집으로 와서 치료받으라 하질 않나, 허리 굽혀 예를 차리지도 않고 경어조차 쓰지 않는 로그는 대등한 관계가 치료에 도움이 될 거라며 가족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애칭, 버티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렇잖아도 처음 만난 일반 국민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왕자는 버럭 화를 내며 일어선다. 그러나 로그는 반드시 치유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증거를 보여주게 되고, 반신반의했던 왕자는 이 유별난 치료사를 믿어보기로 한다.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며 한때 아마추어 연극배우이기도 했던 로그는 버티의 장애가 햄릿처럼 내성적인 성격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더구나 버티의 아버지는 전 세계 4분의 1을 지배하는 대영제국의 왕, 조지 5세가 아닌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왕위 계승서열 2위의 의무를 지고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던 버티는 어린 시절, 왼손잡이와 안짱다리를 억지로 교정받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기억까지 갖고 있었다. 버티는 로그와 함께하는 동안 오래 짓눌려왔던 마음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그렇게 천천히 자신감을 회복하던 중, 왕이 서거한다.
버티의 형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하지만, 그가 결혼하려는 상대 심프슨 부인이 문제였다. 미국인이 왕비가 된다는 것도 국민이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영국의 국교, 성공회가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여성과 영국의 왕이 결혼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불미한 소문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에드워드 8세는 왕위를 포기하게 된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라지만, 형이 내려놓은 왕관은 몇 배나 더 무거워져서 버티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 말더듬이 왕자에서 말더듬이 왕이 된 것이다. 대관식과 성탄절 축하 방송 그리고 대중 앞에 서야 할 수많은 공식 일정 앞에서 버티는 “나는 왕이 아니야!”라며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래도 버티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에겐 국가를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그를 신뢰하는 대신들 그리고 로그가 있었다. 버티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민 신분의 로그에게 계속 치료받기로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히틀러의 선전포고, 왕은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마이크 앞에서 읽어야 하는 원고는 자그마치 9분 분량. 생방송을 앞두고 엄습한 불안과 초조는 왕을 한입에 집어삼킬 것만 같다.
그러나 로그는 왕을 안심시킨다. “다른 건 다 잊어요. 친구인 나에게 말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버티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이크 너머에 서 있는 로그를 바라본다. 못난 모습, 감추고 싶은 약점을 다 알면서도 놀리지 않는 사내. 왕자든 왕이든 동등한 인격체로 당당하게 마주 볼 줄 아는 사람. 무엇보다 ‘버티는 괜찮은 사람, 잘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믿어주는 친구.
말을 더듬는 증상은 세상을 두려워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 세상을 실망시키면 어쩌나 하는 불안의 결과였을 것이다. 버티는 확신에 차서 자신을 응시하는 로그를 바라보며 자신을 믿기로 한다. 그렇게 한 단어, 한 문장, 왕은 진심을 담아 차분하게 그러나 힘 있게 연설을 이어 간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사람들이, 왕실 가족과 귀족들, 내각 각료와 성 밖의 국민 그리고 전선에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장병들까지 신념에 찬 왕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인 조지 6세는 1936년, 왕위를 계승한 뒤 1952년, 5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록 힘겨웠을지언정, 그 때문에 명을 재촉했을지도 모르지만, 왕의 의무와 책임에 충실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말더듬증의 두려움을 이겨낸 왕의 첫 전시방송은 자유를 지켜내려는 영국 국민의 단합과 용기를 북돋우는 감동적인 명연설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무사히 방송을 마친 왕에게 로그는 처음으로 최고의 존경을 담아 “국왕 폐하”라며 예를 갖춘다. 왕은 “나의 친구”라며 그의 공을 치하한다. 로그는 전쟁 중 왕의 모든 연설을 도왔고 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작품상 등 아카데미 4개 부문 석권한 명작
아카데미 수상이 늘 좋은 영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최근 들어 그런 양상이 심해지고 있지만, 이 영화가 2011년 제83회 아카데미 4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데에는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다. 후에 ‘레미제라블’을 연출한 톰 후퍼 감독의 작품이다.
자폐증과 소통 장애를 함께 겪었던 천재 피아니스트를 연기했던 ‘샤인’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던 제프리 러시가 언어치료사로 나오는 인연도 재미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버티의 압박감을 매번 유머러스하게 녹여주는 우아한 농담들도 이 영화가 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왕자님’도 안짱다리에 말을 더듬었고 ‘국왕 폐하’도 한계를 극복해보려고 죽는 날까지 자신과 싸웠다. 하물며 보통 사람인 나는! 군중 선동에 능한 연설의 귀재 히틀러가 세계의 정복자가 되는 대신 연설을 두려워한 말더듬이 왕이 연합군의 수장으로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까지 곱씹어보면 숨 막힐 듯 조여 오던 세상이 좀 만만해지는 것도 같다.
완벽하지 않아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존재인 걸 깨닫고 평생 겸손하게 배우라고. 그렇게 진짜 사람이 되어보라고.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