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만에 신보 ‘푸른 베개’를 발표한 조동익. 사진 최소우주
26년 만에 신보 ‘푸른 베개’를 발표한 조동익. 사진 최소우주

1994년 첫 솔로 앨범 ‘동경’을 낸 조동익은 몇 년 후 한 인터뷰에서 ‘곧’ 두 번째 앨범을 낼 거라고 했다. 그의 ‘곧’은 우리의 ‘곧’보다 아득히 길었다. 1998년의 인터뷰였으니, 22년이 걸렸다. 그의 음악을 아끼는 이들, 조동익이라는 이름에 경외감을 가져왔던 이들 모두가 기다려왔지만 이렇게 불쑥 찾아올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다.

K팝(K-pop)과 슈가 팝이 지배하는 2020년의 한국 대중음악계에 조동익의 두 번째 앨범 ‘푸른 베개’는 시대와 장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초월한 장인의 숨결을 담았다.

조동익은 하나의 영토다. 고 조동진의 친동생인 그는 형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형이 만드는 음악을 동경하며 자연스레 음악계에 몸담았다. 기타리스트이자 영화 음악가인 이병우와 함께했던 듀오 ‘어떤날’이 첫 발자국이었다.

1986년과 1989년에 각각 발매한 두 장의 ‘어떤날’ 앨범은 ‘천공의 섬 라퓨타’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작품이었다. 그들은 많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등장한 ‘어떤날’은 제대로 된 방송도, 공연도 하지 않았다. ‘어떤날’의 음악은 비록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차분한 스테디셀러였다.

그들의 음악에 빠진 사람들은 음악의 꿈을 꿨다. 유희열, 이적이 대표적이다. 단독 콘서트를 한 적 없는 ‘어떤날’의 공연을 기획하고 싶어 공연계에 뛰어든 사람도 있다. 음악 전문가들이 선정한 한국 100대 명반에서 ‘어떤날’ 1집은 2008년 조사에서 4위, 2018년 조사에서는 6위에 올랐다. 2집 역시 각각 11위와 20위를 차지했다. 시대의 책갈피였다.

조동익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더 각인된 계기는 그가 여러 음악가의 앨범에서 편곡 및 프로듀싱을 맡으면서였다. 고 김광석의 2집부터 마지막 앨범까지 조동익의 손을 탔다. 동물원 시절의 아마추어리즘이 남아 있는 1집에 비해 이후의 앨범이 다채로울 수 있던 이유다. 프로듀서로서 1990년대의 조동익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가 수록된 장필순의 5집이다. 다른 가수들의 앨범에서 프로듀싱과 편곡으로 소리 방향을 만들었다면, 1997년의 이 작품은 진두지휘를 해 포크와 모던 록, 일렉트로니카까지 받아들여 아이돌과 인디가 치솟아 오르던 시대 이면의 독보적 서정성을 획득했다. 그의 음악 세계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장필순 6집 ‘Soony6’으로 대표되는 2000년대는 하나의 흐름이 된 동시대적 확장이었으며 스스로 세계가 되는 과정이었다.


‘푸른 베개’ 앨범 커버. 사진 최소우주
‘푸른 베개’ 앨범 커버. 사진 최소우주

음악의 묘목이 숲을 이루다

‘어떤날’부터 시작된 음악의 묘목이 한 세기를 지나며 나무가 됐다. 그렇게 고유의 영토가 됐다. 2005년 그는 동반자인 장필순과 함께 제주로 떠났다. 멀리 애월 해안이 보이는, 하지만 어촌보다는 산촌에 가까운 애월읍 소길리에 정착했다. 한동안 음악에서 손을 놨다. 낮에는 텃밭을 일구고 나무를 했다. 나무는 조각이 되고 땔감이 됐다. 밤에는 온라인 게임을 했다. 장필순은 뜨문뜨문 공연했다. 레이블이자 음악 공동체인 하나음악 식구들이 그의 목소리와 함께했다. 하지만 조동익은 결코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의 술자리에서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을 뿐이다.

8년이 지났다. 2013년 장필순의 7집을 프로듀싱했다. 그 시간에 나무는 숲으로 커졌다. 샘물은 못이 됐다. 2016년 조동진의 유작, 2018년 장필순 8집을 거치면서 그는 떠난 적 없는 음악으로 돌아왔다.

26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건 두 번째 앨범을 냈다. ‘푸른 베개’는 ‘어떤날’부터 그가 이름을 올린 많은 음악을 관통하고 확장한다. 기타와 베이스, 피아노와 첼로로 만들어내는 지극히 단순한 선율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반복된다. 마우스로 하나하나 클릭해서 만들어낸 디지털 부호들은 플랑크톤처럼 선율의 파도를 감싸고 부유한다.

누군가는 이 음반의 절반을 차지하는 연주곡을 미니멀리즘, 앰비언트 같은 말로 부를 테지만, 굳이 그런 용어를 쓰고 싶지 않다. 이것은 그저 조동익의 음악이다. 그가 만들어온 음악에서 보컬을 벗겨낸 후 남은, 따뜻한 소리의 잔향이다. 바다가 된 우주, 우주가 된 바다의 심원이다.

나머지 절반에는 사람의 음성 언어가 있다. 가족의 목소리다. 반려자인 장필순이 ‘내가 내게 선사하는 꽃’ ‘그 겨울 얼어붙은 멜로디로’를, 조동익은 ‘그래서 젊음을’을 불렀다. ‘어떤날’과 그의 첫 앨범을 그리워했던 이라면 음악의 나이테 중심을 느낄 수 있는 노래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조동익이 오랫동안 묵혀둔 음악을 세상에 내놓기로 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곡이 있다. 역시 음악가이자 이 앨범의 제작자인 동생 조동희가 내레이션한 ‘farewell. jdj, knh[1972]’다. 세상을 떠난 형과 형수, 조동진과 김남희에 대한 회고다. 이 부부가 살았던, 또한 수많은 뮤지션의 아지트였던 ‘동진이 형 집’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가사가 있는 노래를 통해 회한과 추억을, 몽상과 묘사를 전한다. 음표와 부호들이 정갈하게 이 가족의 목소리를 보듬는다. 시대와 장르를 초탈한 구도자의 발걸음이 무심하고 밋밋하게 온다.


영화 같은 공간 만들어주는 ‘푸른 베개’

나는 이 앨범을 가급적이면 거리에서 듣곤 했다. 시장 한복판에서, 지하철역 광장에서, 그런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듣곤 했다. ‘푸른 베개’를 듣고 있으면 그 거리와 사람들은 영화처럼 다가왔다. 지나고 나면 기억조차 가뭇해질 시간은 음악의 순간으로 포섭됐다. 아무 음악이나 가질 수 없는 힘이다.

만약 이 앨범을 들어볼 용의가 있다면 꼭 나와 같은 방법으로 시도하길 바란다. 도시여도, 숲이어도, 섬이어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딛고 있는 공간은 영화 없는 영화가 된다. ‘어떤날’의 음악이 그러했듯, 지금 이 시각이 삶의 책갈피가 된다.

문득, 그가 사는 마을을 찾아가고 싶어졌다. 비록 그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가 바라보며 사는 풍경을 나도 바라보고 싶다. ‘푸른 베개’를 들으며 눈을 감고 싶다. 그저 음악과 냄새만을 곁에 남기고 싶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