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가 일본인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뭘까. 감염과 불경기에 대한 불안, 제한된 외출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텔레비전(TV)이다. ‘일본인은 어쨌든 TV’라고 할 만큼 TV가 일본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2019년도 정보통신백서에 따르면 일본인의 하루 평균 TV 시청 시간은 171분으로 인터넷 이용 시간(84분)의 두 배가 넘는다. 모바일 메신저 라인(LINE)이 조사한 2019년도 TV 시청 실태 조사 결과 일본인의 평일 평균 TV 시청 시간은 2.05시간, 휴일은 2.63시간이었다.
일본인의 TV 시청 시간은 넷플릭스, 유튜브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보급이 가속화한 2017년도(평일 2.04시간, 휴일 2.66시간)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TV 의존도가 워낙 높다 보니 넷플릭스와 구글 등 인터넷 업체와 신문사도 TV 광고를 집행하는 상황이다.
일본에서 TV는 정계를 좌지우지할 힘을 가졌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전(前) 일본 총리는 TV를 통한 유세 전략의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전 도쿄도지사, 극우 정치인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전 오사카부 지사는 TV 출연을 계기로 인지도를 높여 출셋길에 올랐다. 최근에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가 매일같이 TV 기자회견을 통해 코로나19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부각하며 재선을 노리고 있다.
일본인의 삶의 동반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TV는 최근 수개월간 시청자의 수요가 폭증했음에도 콘텐츠 기근 현상에 시달리게 됐다. 방영 예정이던 드라마의 상당수가 연기됐다. 출연자와 제작진의 감염 위험을 피하기 위해 스튜디오와 야외 촬영이 극도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이 해외 오지 탐험에 나서는 인기 프로그램 ‘세계의 끝까지 잇테Q(니혼TV)’는 해외 출국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수 주째 과거 미방송분의 편집본을 내보냈다. 이마저도 재고가 바닥나자 기존 출연자들이 원격 화상회의를 통해 만담을 나누는 형태를 취했다. 국제공항에 카메라를 대기하고 있다가 입국한 외국인들에게 일본 방문 이유를 묻고 동행 취재하는 ‘YOU는 뭐 하러 일본에?(도쿄TV)’는 외국인 입국이 사실상 차단되어 찍을 대상이 사라져버렸다.
4월부터 방영 예정이던 인기 연예기획사 쟈니스 소속 연예인을 간판으로 내세운 기대작 ‘미만 경찰 미드나잇 러너’는 촬영 스케줄이 어그러지며 6월 말로 첫 회 방영을 미뤘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방송국들은 1990년대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의 재방송을 편성했다. 후지TV가 매년 8월 진행하는 27시간 연속 생방송 인기 쇼 프로그램 ‘27시간 TV’도 올해는 방영을 단념했다.
TV에서 볼 만한 프로그램이 줄어들자 한류 드라마가 반사효과를 얻기도 했다.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는 넷플릭스 일본 내 시청 순위 1, 2위를 차지하며 한류 드라마 붐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TV 외에도 일본의 ‘놀거리’는 크게 줄었다. 집단 감염의 발생지였던 소규모 콘서트장 라이브하우스는 계획된 모든 공연을 취소하고 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영세한 라이브하우스는 존폐 위기에 처했다. 일본의 양대 음악 페스티벌인 ‘서머 소닉’과 ‘후지 록 페스티벌’도 취소됐다.
돈줄이 말라버린 공연 업계를 돕기 위해 음악인들이 모금을 하기도 한다. 5월에는 루나시, 엘레가든 등 인기 밴드들이 원격 화상회의를 이용한 자선 라이브 공연 ‘뮤직에이드 페스트’를 열었다. 일본의 국민 밴드 ‘사잔 올 스타스’는 6월 25일 1만7000석 규모의 요코하마아레나를 대관해 무관객 라이브를 스트리밍 서비스로 발신했다.
인기 만화잡지 ‘소년점프’는 지난 4월 잡지 발매를 연기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잡지사 직원이 코로나19 감염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였다. 잡지에 인기리에 연재되는 ‘원피스’ 등 일부 인기 만화는 작화 보조자를 만화가의 집에 상주시키고, 담당 기자에게 원고를 전달하는 옛날 방식을 고수해 제작한다. 감염 위험을 피하려면 연재 중단이 불가피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고군분투 중
5월 긴급 사태 선언이 해제되고 각종 제한이 점차 완화하면서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고군분투 중이다. 특히 일본 방송인들의 눈물겨운 사투가 눈에 띈다. 출연자들 사이를 투명 플라스틱판으로 나누는 것은 예사다. 출연자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고 목소리만 녹음하거나, 거리를 멀찍이 두고 찍은 화면을 합성해 마치 스튜디오에 모여 앉아 있는 것 같은 연출을 선보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제작이 중단된 초기에는 원격 카메라를 연결해 분할된 화면을 송출하는 기초적인 방식의 방송에 그쳤지만, 최근 들어서는 크로마키(두 개의 영상을 합성하는 기술)를 활용해 거의 위화감이 없는 수준의 방송을 보여주고 있다. 탤런트에게 모션 센서를 부착해 제작하는 가상의 캐릭터인 ‘브이튜버’가 등장하고, 3D 컴퓨터그래픽(CG)으로 가상 연예인을 제작해 출연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쯤 되자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방송 제작의 신기원이 열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라이브하우스는 떠난 관객의 발길을 돌리기 위해 갖은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대형 비닐을 설치하고, 관객은 사방 1m 간격으로 떼어놓은 의자에 착석해 마스크를 착용한 채 조용히 공연을 관람한다. 그래도 수개월 만에 콘서트를 관람한 관객들은 “생음악을 듣는 게 이렇게 감동적일 수 없다”며 눈물을 보였다.
디즈니랜드, 유니버설스튜디오 등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일본 유원지 협회는 ‘코로나19 감염 확대 예방 지침’을 발표하고 ‘롤러코스터 탑승 시 비말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소리를 지르지 말아 달라’는 방침을 세웠다. 빈축을 사자 고소공포증이 있는 한 유원지 운영 회사 임원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악’ 소리 한 번 없이 롤러코스터를 완주하는 동영상을 올려 찬사를 받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가 가져온 수개월간의 무료함 탓일까. 최근 일본 사회는 스트레스가 팽배하다. 먹고사는 것만큼 노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가 됐다는 말도 나온다. 외출 자제 기조가 계속되며 가정불화나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TV, 음악과 만화가 사라진 세상은 이렇게나 암울하다. 지난해 타계한 일본 연예계의 거물 쟈니 기타가와(ジャニ-喜多川) 전 쟈니스 사무소 사장은 생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호모루덴스(Homo Ludens·인간의 본질을 유희에서 파악하는 인간관)는 코로나19에 져선 안 된다. 그러니 부디, 하루빨리 쇼의 막이 열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