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국가의 신용등급이 요동치고 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피치 레이팅스(Fitch Ratings·이하 피치)가 올해 상반기 역대 최대 규모로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고 7월 3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CNBC 방송이 보도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경기 침체에 맞서 각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부은 결과다.
피치의 제임스 매코맥 국가신용등급 글로벌 총괄은 CNBC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미 상반기에만 33개국의 신용등급을 낮췄다”면서 그동안 한 해를 기준으로도 이런 규모의 하향 조정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코노미조선’이 피치의 상반기 공시 현황을 살펴본 결과,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된 국가는 A등급 4개국, B등급 17개국, C등급 3개국, D등급 3개국이었다. 피치는 신용등급을 A부터 D까지 알파벳 순서대로 나눠 평가한다. AAA, AA+, AA, AA- 등 세부 등급을 포함하면 총 23개등급이다.
A등급 내에서 하향 조정된 국가는 캐나다(AA+), 홍콩(AA-), 영국(AA-), 슬로바키아(A)였다.
피치는 6월 24일 캐나다의 신용등급을 기존 AAA에서 AA+로 한 단계 하향 조정했다. 올해 캐나다의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16.1%에 이르고,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이 115.1%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 데 따른 것이다. 지난해 캐나다의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88.3%였다.
대외 리스크와 더불어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국가들도 신용등급이 하락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리스크가 있는 영국은 3월 27일 국가신용등급이 AA에서 AA-로 하향 조정됐다. 국가보안법 시위 장기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홍콩도 4월 20일 같은 등급으로 하향 조정됐다. 두 국가의 등급인 AA-는 한국과 같은 수준이다.
국가 부도 사태에 빠진 국가의 신용등급도 요동쳤다. 에콰도르는 신용등급이 3월 19일(B-→CCC), 3월 24일(CCC→CC), 4월 9일(CC→C), 4월 20일(C→RD)에 순차적으로 강등됐다. RD는 부분적인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의미한다. 불과 한 달 만에 등급이 네 번 조정됐다. 아르헨티나도 4월 6일 CC에서 RD로 내려앉았다가 4월 7일 CC로 반등했지만, 4월 17일(CC→C)과 5월 26일(C→RD) 두 차례 조정 끝에 RD로 최종 강등됐다.
피치는 전망도 밝지 않을 것으로 봤다. 7월 7일 피치에 따르면, 현재 신용등급 전망이 ‘부정적(negative)’인 국가가 40개국에 달한다. 대다수가 중남미, 중동, 아프리카 권역 국가에 해당한다. 통상 부정적 평가를 받은 국가는 평균 9개월 내에 등급이 하향 조정된다. 실제 부정적 평가를 받은 국가의 등급 하향 조정 비율은 56%에 달한다.
피치는 앞서 5월 보고서에서 “국제 유가 약세와 코로나19 확산 등의 영향으로 올해 디폴트에 빠진 국가가 사상 최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매코맥 총괄은 CNBC와 인터뷰에서 “각국 정부가 코로나19에서 벗어난 이후 채무 수준을 낮출 수 있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채무 수준이 향후 국가신용등급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라는 의미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6월 발표한 ‘재정 분석 보고서’에서 경기 부양을 위해 세계 각국이 11조달러(약 1경3200조원)를 투입할 것으로 예측했다. 4월에 추산한 8조달러에서 3조달러나 늘어난 수치다. CNBC에 따르면 전
세계 GDP 대비 공공 총부채 비율은 100%를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피치는 베트남의 신용등급을 고평가했다. 피치는 4월 베트남의 신용등급을 BB로 유지하면서, 전망을 ‘안정적(stable)’에서 ‘긍정적(positive)’으로 상향 조정했다. 피치에 따르면 베트남은 코로나19 여파에도 2020년 경제 성장이 기대되는 곳이다. 베트남의 올해 2분기 경제 성장률은 지난해보다 0.4% 올랐다.
이외에도 피치는 4월 24일 자체 보고서를 통해 룩셈부르크(AAA), 싱가포르(AAA), 마카오(AA), 러시아(BBB), 에스토니아(AA-)를 재정 여건이 견조한 국가로 꼽았다.
2023년까지 韓 부채 비율 46% 넘지 말아야
피치는 2월 한국의 신용등급을 AA-로 유지했다. 피치는 “한국은 북한과 관련된 지정학적 위험과 인구 고령화 및 생산성 하락으로 인한 중기 구조적인 도전에도 견실한 재정 관리와 꾸준한 거시경제 운영을 보이고 있다”며 “12월 제정된 2020년 예산안은 부진한 성장 전망에 대응해 상당한 경기 부양책으로 작용했고 한국은 단기적인 재정 부양책을 사용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있다”라고 밝혔다.
다만 피치는 “GDP 대비 부채 비율이 2023년 46%까지 증가할 경우 중기적으로 신용등급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3차 추가경정예산 편성으로 한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43.5%까지 높아진 상황이다.
피치는 2012년 9월 6일 한국의 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한 단계 올린 뒤 8년간 유지하고 있다. 또 다른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Aa2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AA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