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손을 줄까, 파란 손을 줄까? 재래식 화장실이 흔하던 시절,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장난이다.
빨간 약을 먹을래, 파란 약을 먹을래?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면 엉뚱하게도 공포의 화장실 농담이 생각난다.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음양의 이치와 태극무늬, 그 색깔에 대해서도 잘 알았을 것 같은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남매가 되었음)가 우리나라 변소 귀신에 대해 들어본 적 있었던 게 아닐까, 짓궂게도 궁금해진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토머스 앤더슨은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밤에는 네오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실력 좋은 해커다. 어느 날 그는 스미스라 불리는 비밀 요원에게 체포돼 그동안 저지른 범죄를 눈감아 줄 테니 정부에 협조하라는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매력적인 해커 트리니티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스미스 일당이 그토록 잡고 싶어 하는 반정부 세력의 거물, 모피어스와 대면하게 된다.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어.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인 거지.” 모피어스는 네오가 살아온 세상이 매트릭스라는 가상세계라고 말한다. 2199년의 진짜 세계를 알고 싶다면 선택해야 한다며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내민다. 파란 약을 고르면 지금까지처럼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다. 빨간 약을 고른다면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을 알게 되겠지만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세상이 이상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보이는 것이 진짜라고 믿으며 살아갈 것인가, 달콤한지 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을 것인가, 갈등하던 네오는 빨간 약을 집어삼킨다. 네오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고 놀란다. 21세기 초, 인류와 인공지능(AI) 간에 전쟁이 벌어져 지구는 초토화됐고 생존한 인류는 시온이라는 지하도시에 숨어 살고 있다는 걸, 진짜인 줄 알았던 현실은 AI가 통제하는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걸 어떻게 믿어야 할까? 더 당혹스러운 것은 네오가 매트릭스를 무너뜨리고 인류를 구원할 인물이라고 모피어스가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맙소사! 매트릭스 프로그램에 연결하기 위해 태어날 때부터 몸에 장착되어 있다는 컴퓨터 접속 장치도, 끔찍하고 열악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멀미가 날 지경인데 세상을 구원하다니. 하지만 네오는 엄청난 운명의 진위는 일단 접어두고 모피어스의 계획에 따라 스미스 일당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실력을 매트릭스 안에서 쌓아간다. 있는 줄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해가던 네오는 매트릭스 안에 존재하는 예언자 오라클을 만난다. 자신이 인류의 구원자인지 아닌지 확인받는 자리, 네오는 어떤 답을 바랐을까?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가는 길, 시온을 찾아내 인류를 전멸시키려고 계획하고 있던 스미스 일당이 그들을 잡으려고 포위망을 좁혀온다. 모피어스는 트리니티에게 네오를 안전하게 데려가라며 스스로 미끼가 되어 체포된다. 하지만 그들의 몸이 기다리고 있는 본부는 이미 배신자 사이퍼에게 장악되어 버린 상태다.
거짓과 진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의외로 어려운 문제다. 아마도 감독은 진실이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려고 빛 하나 없는 지구, 폐허가 된 회색 도시, 어둠침침한 건물들, 다 해진 셔츠와 구멍 난 스웨터, 낡고 녹슨 기구들과 딱딱한 침대, 먹을 거라곤 콧물 같은 묽은 죽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매트릭스 세계로 들어갈 때 네오의 근사한 검은 코트와 선글라스, 번화한 도시를 걸어가던 여인의 빨간 원피스 그리고 따뜻한 조명을 비추던 레스토랑에서 사이퍼가 먹고 마시던 와인, 스테이크와 대조를 이룬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 한 번뿐인 삶인데 진실이 대체 뭐라고 저토록 춥고 배고프고 위험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거지?
사이퍼도 그랬다. 10년 가까운 고생에 진저리를 내며 빨간 약을 선택했던 순간을 후회해온 그는 스미스에게 포섭되어 풍요로운 매트릭스의 생활을 약속받는다. 그 대가로 사이퍼가 할 일은 현실로 돌아와야 할 동료들의 생명줄을 차례차례 끊어버리는 것. 네오의 플러그를 뽑기 전 사이퍼는 전화기 너머 트리니티에게 조롱하듯 말한다. “그가 구원자라면 그를 죽일 수 없도록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어?”
네오는 구원자일까, 아닐까? 네오는 자신이 그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모피어스를 구할 방법을 찾아내고 성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구원자, 바로 그임을 깨닫는다. 오라클을 만날 때 네오는 자신이 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명이 꺼져가는 위기에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트리니티의 사랑을 느끼며 네오는 스스로를 구원자라고 믿는다. 그 순간, 네오는 비로소 완전한 그가 된다.
2021년 4편 나오는 SF 장르의 걸작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기대와 두려움으로 들썩이던 1999년에 개봉한 ‘매트릭스’는 공상과학(SF)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인간에게 내재한 살육의 본능을 오락으로 해소해내면서도 세상과 개인의 관계를 깊이 돌아보게 한다. 춤추듯 공중부양해서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하는 트리니티의 우아한 공격, 총알을 피해 긴 코트를 입은 네오가 반쯤 누운 상태로 360도 회전하는 슬로모션 등 현란한 화면도 눈을 즐겁게 한다. 2021년 겨울에 4편이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누구나 진실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느 쪽이 진실이고 어느 쪽이 거짓인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진실 따위 없다는 주장도 있다. 정면에서 보면 직사각형, 위나 밑에서 보면 원으로 보이는 컵처럼 입장에 따라 진실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짓과 진실은 직사각형이냐 원이냐를 가려내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컵인지 아닌지의 문제이다. 컵에 밥을 말아 먹으니 그건 밥공기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컵은 컵이다. 코끼리 일부를 더듬은 장님이 무슨 말을 해도 코끼리가 코끼리 아닌 것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매트릭스 안에서 살고 있다.
진실은 화려하게 피어난 수많은 거짓 뒤에 감추어져 있다. 파란 손을 줄까, 빨간 손을 줄까, 묻는 귀신은 없지만 파란 약을 줄까, 빨간 약을 줄까, 묻는 모피어스는 항상 우리 안에 존재한다. 매 순간 어느 한쪽을 선택해온 결과가 눈앞의 현실이다. 그리고 앞으로 완성될 미래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렸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