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스키장에 놀러 왔다가 이커머스의 미래를 바꾸게 된 남자’ ‘열등생, 천재 프로그래머, 억만장자’.
쇼피파이(Shopify)의 공동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토비아스 뤼트케(39)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는 2015년 뉴욕증권거래소와 토론토증권거래소에 동시 상장된 쇼피파이의 지분 6.7%를 갖고 있다. 12월 15일 현재 쇼피파이의 시가총액은 141조원. 지분 평가액만 9조5000억원에 달한다. 12월 8일(현지시각) 미국 ‘포브스’가 평가한 그의 보유자산은 약 10조원이었다.
쇼피파이는 2006년 캐나다 오타와에 설립된 이커머스(e-commerce·전자상거래) 플랫폼 개발·운영 기업이다. 창업 14년 만에 아마존의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격화한 올해 3월 이후로 주가가 세 배 가까이 상승했다.
뤼트케는 독일 국적의 캐나다 시민권자다. 1981년 독일의 인구 11만 명 소도시 코블렌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 못 하는 ‘문제아’였다. 그러다가 스물한 살에 캐나다로 도피하다시피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아예 눌러앉은 뒤 쇼피파이를 창업했다.
뤼트케의 성공 스토리는 창업에 도움이 될 몇 가지 팁을 알려준다. 언어도 다른 타국에 혈혈단신 정착해 20대 창업, 14년 만에 아마존에 맞설 거대 기업을 일군 그의 인생에서 눈여겨볼 점 5가지를 정리했다.
1│독일의 교육 시스템 아래에서 그는 열등생·부적응자일 뿐이었다
뤼트케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지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는 ‘열등생’이었다. 대학 진학이 목표인 김나지움(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와 비슷)에 들어갔지만, 적응을 못 해 레알슐레(한국의 실업계 고등학교와 비슷)로 옮겨야 했다.
레알슐레에서도 최종 학년인 10학년(한국의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열여섯에 중퇴했다. 뤼트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반항아 기질이 셌다. 다른 사람이 무언가 지시하면, 나는 반대로 할 생각부터 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컴퓨터였다. 공부 대신에 게임과 프로그래밍을 하며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레알슐레를 중퇴한 뒤에는 직업학교의 견습 프로그램에 들어가 지멘스에서 프로그래밍을 하게 됐는데, 그의 반항적 성향이 또 문제가 됐다. 기업 환경이 자신을 짓누른다고 생각했고 상사·직원들과 충돌했다. 그때 직장에서 아웃사이더였던 50대 선배의 말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 선배는 “토비아스,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도 기업 문화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은 회사에서 비밀로 하는 게 좋아.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풀리기 시작할 거야”라고 했다.
훗날 쇼피파이를 창업했을 때, 뤼트케는 지멘스 시절 자신과 같은 인습타파자, 아웃사이더들을 포용하고 그들이 보람을 느끼고 성과를 내는 일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쇼피파이는 직원을 뽑을 때 스펙은 좀 떨어지더라도 의욕이 넘치고 잠재력이 보이는 이들을 중시한다. 획일화된 인재상을 거부하는 문화가 회사 전반에 퍼져 있다. 쇼피파이는 이를 통해 다양한 배경과 성향을 가진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2│어릴 때부터 프로그래밍에 능했다. 이것이 훗날 쇼피파이 성공의 토대가 됐다
뤼트케는 여섯 살 때 부모에게서 ‘코모도어 64’라는 개인용 컴퓨터를 선물 받았다. 열두 살 때부터는 자신이 플레이한 게임의 코드를 다시 쓰고, 컴퓨터의 하드웨어도 고칠 수 있게 됐다. 열여섯에 학교를 중퇴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견습생이 된 것도 이때부터 쌓은 실력 덕분이었다.
훗날 그는 쇼피파이의 개발 기반이 된 루비 온 레일스(Ruby on Rails) 프레임워크 개발팀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 됐다. 그리고 액티브 머천트(Active Merchant) 같은 오픈소스 라이브러리를 개발하기도 했다.
3│우연한 기회, 한 번의 선택을 통해 새로운 인생이 열릴 수 있다
지멘스에서 그는 기계 속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MMORPG(대규모 다중 접속자 온라인 역할 수행 게임)인 애쉬런즈콜(Asheron’s Call)에 빠져들었다. 그는 가상 세계에서 캐나다인 피오나 맥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스물한 살이던 2002년 겨울 휴가를 내 캐나다 휘슬러로 갔고, 맥킨과 스노보드를 타며 사랑을 키웠다. 이후 맥킨의 고향인 오타와에 정착, 그녀와 결혼해 세 자녀를 낳았다.
뤼트케는 2004년 스물셋에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그들의 집 차고에서 스노보드 가게를 열었다. 하지만 당시 썼던 이커머스 플랫폼이 너무 불편하고 비쌌다. 뤼트케는 물론 맥킨도 프로그래밍 전문가였기 때문에, 플랫폼을 새로 만들기로 했다.
2006년엔 아예 이커머스 플랫폼 전문 회사를 세우게 됐는데, 이것이 쇼피파이의 시작이었다. 맥킨과의 사랑, 독일과 그곳의 직장을 버린 채 캐나다로 이주한다는 선택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것이다.
4│문제를 고치는 것이 옳다고 느낀다면, 다른 데 기대지 말고 스스로 풀어라
뤼트케는 쇼피파이 창업 당시 명확한 목표를 갖고 시작했는데, 누구나 이커머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워드프레스를 통해 사람들이 블로그나 콘텐츠 웹사이트를 쉽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처럼, 쇼피파이를 쓰면 기술을 몰라도 즉시 온라인 스토어를 개설·운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고객이 팔 물건만 가지고 있으면, 재고 추적이나 배송, 판매 및 마케팅 분석 같은 회사의 핵심 기능까지 전부 대신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이트 개설·운영비, 판매 과정에서 드는 비용을 최소화해 쇼피파이라는 플랫폼에 점점 더 많은 고객이 모이도록 만들었다.
5│독립적인 사고를 중시한다
뤼트케는 분기마다 일주일씩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책을 싸 들고 숲에 들어가기도 한다. 사무실에 출근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은 하지 않는다. 이때 대부분의 시간을 10년 뒤 쇼피파이를 생각하며 보낸다고 한다. 평소에는 단기 계획에 매몰돼 있기 때문에 장기 계획을 위한 시간을 일부러 갖는다는 얘기다.
또 그는 방해받지 않는 충분한 수면 시간을 중요시한다. 2019년 12월 말 자신의 트위터에 “일을 잘하려면 밤에 푹 자야 한다”라며 “나는 하루 8시간의 수면이 꼭 필요하다”라고 쓰기도 했다.
뤼트케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눈에 안 띄는 억만장자일지 모른다. 미국 투자가들이 자금을 지원하면서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라고 요구했지만, 한적한 오타와를 떠나지 않고 은인자중하고 있다.
자전거로 출근하며, 175㎝ 평범한 키에 말도 조용하게 한다. 직원들은 그를 ‘토비’라고 부른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트위드 헌팅캡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