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여진 쿼드자산운용 PEF운용본부 매니저연세대 경영학, 전 신영증권 제약·바이오 애널리스트
엄여진 쿼드자산운용 PEF운용본부 매니저
연세대 경영학, 전 신영증권 제약·바이오 애널리스트

올해 5월부터 공매도(空賣渡·주가 하락이 예상될 때 주식을 빌려 판 뒤 나중에 주가가 내려가면 싸게 사서 갚아 차익을 얻는 투자 기법)가 재개되자 이 제도를 둘러싼 해묵은 논란이 다시 촉발됐다. 한국 증시에서 현행 공매도 제도는 개인 투자자에게 참여 조건이 제한적인 데 반해 기관 투자자에게는 관대한 편이다. 이 때문에 공매도 제도는 ‘기관 투자자의 전유물’ 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국내 증시에는 공매도 제도만큼이나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있다. 바로 공모주 시장이다. 2020년 공모주 시장은 역대 최고의 성과를 기록했으며 올해도 그 기세가 이어지고 있다. 우선 5월 11일에 상장한 SK아이이테크놀로지(SK IET)의 사례를 보자.

사회적 관심이 뜨거웠던 SK IET 상장을 앞두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기관 투자자 배정 물량을 줄여달라’는 내용의 글까지 올라오는 등 공모주 물량 분배에 관한 개인 투자자의 불만이 커졌다. 이에 부담을 느낀 증권사는 기관 투자자 물량 배정을 여러 차례 번복하다가 결국 당초 계획보다 개인 투자자에게 107만 주를 더 배정했다. 하지만 이는 개인 투자자에게는 체감할 수 없는 수준의 물량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기관과 개인 모두 불만만 쌓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공매도와 마찬가지로 공모주도 기관과 개인 간 문제 같다. 반전은 SK IET 상장 첫날 일어났다. 상장 당일 외국인 투자자의 매도 물량이 대거 쏟아지며 이 회사 주가는 시초가 대비 26% 하락한 상태로 마감한 것이다. 외국인의 매도 물량이 상장일에 쏟아져 나온 배경은 뭘까. 증권사가 외국인 투자자에게만 유독 ‘의무보유 확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보유 확약은 주가 안정을 위해 일정 기간 매도하지 않고 의무적으로 보유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의무보유 확약을 신청하면 미확약 시보다 공모주 물량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어 기관 투자자는 유망 종목의 경우 의무보유 확약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자는 의무보유 확약 없이도 충분한 물량을 배정받는 일이 흔하다. 금융감독원이 2020년에 상장한 기업 중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의 기업공개(IPO) 배정 물량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의 의무보유 확약 비율은 평균 4.64%에 불과했다. 지난해 공모주 열풍 속에서 대어급 공모주를 배정받기 위해 기관 투자자와 개인 투자자가 고군분투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외국인 투자자의 특혜는 과도하다는 생각이 든다.


큰손 고객인 외국인 투자자는 의무보유 확약 없이도 충분한 물량을 배정받는 일이 흔하다.
큰손 고객인 외국인 투자자는 의무보유 확약 없이도 충분한 물량을 배정받는 일이 흔하다.

외국인은 의무보유 확약 생략

증권사가 외국인 투자자에게 많은 물량을 배정하는 건 증권사 입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는 주식 매매량이 많은, 즉 주식 매매 수수료를 많이 내는 ‘큰손’ 고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결국 우수고객 ‘접대’나 마찬가지이며, 시장 교란을 막기 위해 증권사에 의무화돼 있는 차이니스 월(정보 교류 차단) 제도를 무색하게 만드는 행위다.

외국인의 주식 매매 주문을 받는 부서는 주로 해외 영업부서나 법인 영업부서이고, 공모주 물량을 배정하는 부서는 IB(투자금융) 부서다. 차이니스 월이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해외 영업부서에 주문을 많이 내는 외국인 투자자에게 IB 부서가 공모주를 많이 배정해주는 건 문제의 소지가 크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의무보유 확약도 없이 많은 물량을 배정해주는 건 더 큰 문제다.

외국인 투자자가 누리는 특혜에 관한 또 다른 문제는 외국인 투자자의 실체다. 실제로 매매 주체가 드러나지 않는 블록딜(시간 외 대량 매매)과 같은 장외거래의 경우 외국인 투자자라고 사칭하는 운용사가 금융감독원에 적발되기도 한다. 조세 회피 지역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고 활동하는 정체불명 투자자도 많은 실정이다.


4월 27일 SK아이이테크놀로지 IPO 대표 주관사인 미래에셋증권 광화문 지점을 찾은 고객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미래에셋증권
4월 27일 SK아이이테크놀로지 IPO 대표 주관사인 미래에셋증권 광화문 지점을 찾은 고객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미래에셋증권

공모주 우선 배정 챙기는 ‘좀비’

최근 공모주 열풍에는 가짜 외국인 투자자뿐 아니라 가짜 자산운용사까지 등장하고 있어 우려스럽다. 자산운용사의 공모주 우선 배정을 노리고 자산운용사로 승인되지 않은 가짜가 운용사를 사칭해 공모주 우선 배정을 노리다가 적발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 증권가 오피스텔에 방 한 칸 얻어놓고 사무실 주소만 그럴듯하게 꾸민 가짜 외국인 투자자와 가짜 자산운용사가 부지기수다.

기관 투자자에게 주어진 공모주 특혜를 누리는 좀비 자산운용사도 있다. 좀비 자산운용사란 자산운용사 인가를 받긴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영업을 거의 하지 않고 공모주 우선 배정만 받아서 연명하는 운용사를 말한다. 라임자산운용이나 옵티머스자산운용 사태 이후 자산운용사를 선정하는 고객 기준이 엄격해지자 일부 실력이 미진한 운용사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운용사는 굴리는 펀드가 전무해졌다.

운용하는 펀드가 없으면 수익도 날 수 없고, 수익이 없는 운용사는 퇴출당하는 게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런데 상당수 좀비 운용사가 폐업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공모주 우선 배정 때문이다. 부실 운용사가 고유 계정으로 공모주를 우선 배정받아 차익을 내면서 연명하고, 나중에 경영권을 매각해 몇억원씩 경영권 프리미엄을 챙긴다.

가장 큰 문제는 좀비 자산운용사가 자신들의 몫으로 공모주 우선 배정을 챙겨가면 개인 투자자에게 돌아갈 몫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금융 당국은 실질적으로 운용하는 펀드가 없거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부실 자산운용사의 공모주 우선 배정 실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 투자자와 자산운용사에 공모주 우선 배정을 해주는 건 이들이 자본 시장을 활성화하고 공모주 시장을 안정화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공모주를 받아 단타 매매를일삼는 좀비 자산운용사나 한국 자본 시장에 아무런 기여도 없이 단물만 빨아가는 외국인 투자자에게 공모주 우선 배정이라는 큰 혜택을 주는 것은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요즘 대한민국의 최대 화두 중 하나가 ‘공정’이다. 공정에 관한 사회적 가치가 중요해진다는 것은 그 사회가 성숙해지고 있다는 좋은 의미일 것이다. 우리 공모주 시장이 과연 공정한가에 대한 금융 당국의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