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반도체 쇼티지(공급 부족) 문제가 해결돼도 완성차 업체들은 공급망에서 이런 일이 재현되지 않도록 아마도 반도체 생산을 인하우스(내부)에서 하려고 할 수 있다.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가 전기차용 배터리 기술에 투자하듯이 비슷한 모습을 반도체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에드 김 오토퍼시픽 자동차 전문가는 6월 13일(현지시각) 미국 ABC방송과 인터뷰에서 이같이 예상했다. 하지만 국내 현대자동차는 이 같은 움직임에 이미 나서기 시작했다.
현대차그룹은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 조성을 위해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들과 손잡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국내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 업체를 선정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팹리스는 반도체를 설계하지만, 생산 공장이 없는 회사를 의미하고, 디자인하우스는 팹리스가 그린 설계도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생산 공정에 적합하도록 제조용 설계도로 만드는 회사를 이른다.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는 맞춤형 반도체를 만드는 제조 생태계에 빠질 수 없는 연결고리다. 이 때문에 반도체 업계는 현대차그룹의 움직임에 대해 ‘공급망 재편’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하반기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쇼티지가 나타나자 재고를 넉넉하게 확보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올해 들어 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이 오기 시작했고, 결국 반도체 내재화로 가닥을 잡았다는 게 업계 해석이다.
현대모비스, 반도체 기업과 협력 모색
현대차그룹의 반도체 내재화는 현대모비스가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모비스는 최근 정부가 마련한 ‘미래 차-반도체 연대·협력 협의체’를 통해 앞으로 만들려고 하는 차량용 반도체 리스트와 내용을 팹리스와 공유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해당 리스트에는 마이크로컨트롤유닛(MCU), 디스플레이구동칩(DDI), 전력관리반도체(PMIC) 등이 포함돼 있다. 대부분 현대차그룹의 핵심 협력사가 수급에 애를 먹었던 품목들이다.
이 가운데 MCU는 자동차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반도체다. 차량용 반도체의 약 30%를 차지한다. MCU는 두뇌처럼 각 기관에 작용하면서 조건을 만족할 경우 특정 기기를 작동하는 역할을 한다. MCU는 네덜란드 NXP와 일본 르네사스가 각각 시장의 31%를 만들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독자 칩 개발을 외주에 맡길 것으로 보인다. 구조가 단순한 아날로그부터, 자율주행 기능 등에 필요한 복잡한 통합 칩(SoC) 종류도 다양하다. 현대모비스가 요구하는 기능과 성능을 일러주면 팹리스가 이에 맞춰 설계하는 식이다. 이는 테슬라가 삼성전자 시스템LSI에 맞춤형 SoC 설계와 생산을 맡기는 것과 비슷하다.
비교적 기술 진입 장벽이 낮은 인포테인먼트용 반도체 개발부터 회사가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어 MCU, PMIC,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등으로 기술 범위를 넓혀간다는 포석이다.
현대모비스는 올해 1분기 보고서에서 “연구개발(R&D) 부문 내 반도체 설계 섹터를 신설해 시스템·전력반도체 등 미래형 차량용 반도체 내재화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운드리는 국내 기업인 DB하이텍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대부분은 첨단 공정으로 만들어지는 12인치(300㎜) 웨이퍼가 아닌, 구형 공정인 8인치(200㎜) 웨이퍼(반도체 원판)로 생산된다. 키파운드리 역시 후보 중 하나로 꼽힌다.
팬데믹 이후 부각된 취약한 공급망
현대차그룹이 반도체 내재화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탓에 부각된 반도체 공급망의 취약성이 있다. 자동차의 전체 부품 수는 2만~3만 개쯤이다. 이 가운데 반도체는 10% 수준인 200~300개가 들어간다.
팬데믹 이후 전자 기기 수요가 크게 늘면서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가 공급 부족을 빚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코로나19 초기 비대면 흐름이 확산하면서 생산 부진을 겪은 탓에 원래 계획보다 반도체 주문량을 줄였고, 차량용으로 할당된 물량이 당장 급한 전자 기기 쪽으로 전환됐다. 하반기 회복되지 않을 것 같던 이동량이 증가하면서 자동차 산업 수요도 빠르게 회복됐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배정된 반도체 물량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자동차 업계 역시 반도체 수급난을 겪게 됐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반도체 쇼티지로 올해 전 세계 자동차 업계가 빚을 생산 차질 물량은 400만~600만 대로 추산된다. 이로 인해 글로벌 자동차 산업에 초래된 비용만 올해 1100억달러(약 124조300억원)에 달할 것으로 ABC방송은 추정했다. 업계는 차량용 반도체 쇼티지 문제가 내년까지 계속 될 것으로 우려한다.
현대차그룹 역시 최근 반도체 쇼티지에 국내 사업장뿐 아니라 해외 공장까지도 생산 일정을 조정하는 등 어려움에 처해 있다. 특히 국내 자동차 업계는 반도체 수입 물량이 98%에 이를 정도로 해외 의존이 심하다. 비단 코로나19뿐 아니라 얼마든지 해외 시장 환경 변화에 산업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현대차그룹이 움직인 것으로 파악된다.
미래 車 위한 포석…국내 생태계 조성 의지
현대차그룹의 이런 움직임은 향후 자동차 반도체 시장 성장을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현재는 자동차 전체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부품 수가 1% 수준에 불과하지만, 레벨3 이상 자율주행이 적용된 자동차가 본격 도입되는 2022년 이후에는 이 비중이 10%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게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의 전망이다. 전기차 생산이 늘어나는 것도 차량용 반도체 수요를 키운다.
또 현재 일본의 10분의 1 크기에 불과한 국내 차량용 반도체 업계가 자생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무역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차량용 반도체 매출액은 2019년 기준 9억4000만달러(약 1조602억원)로 일본(92억6000만달러)과 큰 차이를 보인다. 차량용 반도체 국산화율은 5% 미만이다.
현대차그룹이 반도체를 직접 만들 것이라는 신호는 지난해 말 현대오트론의 반도체 사업 부문을 1332억원에 인수했을 때부터 감지됐다. 현대오트론 반도체 사업 부문은 차량용 반도체를 현대차그룹에 납품해 왔다. 현대모비스 관계자는 “최근 인수를 통해 차량용 반도체 분야의 전문적인 설계, 개발, 검증 역량을 키워 나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