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게임 업계에 있어 ‘3N’은 상징적인 단어로 여겨진다. 게임 업계를 지배하고 있는 3개의 큰 기업을 의미하는 것이어서다. 과거 게임 산업 태동기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3N은 넥슨과 네오위즈, 엔씨소프트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넥슨이 이후 ‘메이플스토리’ 등으로 치고 나가면서 넥슨을 쫓는 3개의 회사(네오위즈·엔씨소프트·NHN)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여기에 독주하는 넥슨과 5인자인 넷마블을 묶어 5N이라고 부르는 시기도 있었다.
넥슨은 2011년 한국 게임 회사로서는 최초로 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고, 이어 2016년에는 넷마블이, 2017년에는 엔씨소프트가 각각 매출 1조원을 넘기면서 3N의 위상은 커져만 갔다. 지난해 기준 넥슨은 매출 3조1306억원으로 역시 업계 최초로 매출 3조원을 돌파했으며, 넷마블과 엔씨소프트는 각각 2조4848억원, 2조4162억원을 기록하면서 3N의 시대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최근 3N으로 대표돼 왔던 게임 업계에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새롭게 K·S·K·P가 등장한 것이다. 연 매출 1조원 이상을 뜻하는 ‘1조 클럽’에 가입한 크래프톤(K), 스마일게이트(S)를 비롯해 인수합병(M&A)과 투자에 속도를 내며 세를 불려 나가고 있는 카카오게임즈(K)와 펄어비스(P)가 신흥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크래프톤, 기업가치 3N 넘었다
올해 기업공개(IPO) 최대어로 꼽히는 크래프톤은 지난 1분기 2272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이는 엔씨소프트와 넷마블이 1분기에 기록한 영업이익 567억원, 542억원을 네 배쯤 뛰어넘는 수치다. 지난해 크래프톤은 7739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는데, 이는 업계 3위 넷마블(2720억원)보다 많은 금액이다.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8247억원으로, 크래프톤의 추격을 받고 있다.
크래프톤은 업계 맏형 넥슨과도 비교할 만하다. 비록 1분기 영업이익은 넥슨이 기록한 4551억원의 절반 수준이지만, 기업 가치에서는 넥슨에 전혀 밀리지 않고 있다. 크래프톤이 최근 금융위원회에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따르면 상장 예정 주식 수는 5030만4070주로, 공모 희망가를 적용하면 23조~24조원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는 넥슨의 6월 21일 기준 시가 총액(약 22조원)을 앞선다.
증권가 등에서는 크래프톤이 대표작 ‘배틀그라운드’ 외에는 뚜렷한 인기작이 없어 현재의 기업 가치는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 크래프톤은 배틀그라운드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신작 ‘배틀그라운드: 뉴스테이트(NEW STATE)’의 출시가 임박했고, 게임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는 텐센트 ‘화평정영’에 대한 기술 로열티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세계 2위 시장으로 꼽히는 인도에서는 곧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인도’의 재출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크래프톤은 사업 다각도를 위한 투자에도 활발하다. 최근 인수한 VCNC의 메신저 앱 ‘비트윈’이 대표적이다. 크래프톤은 비트윈의 딥러닝 기술을 통해 다양한 인공지능 기술을 연구한다는 방침이다.
‘1조 클럽’ 스마일게이트…한국 치중 넥슨·엔씨와 다른 행보
스마일게이트의 성장세도 무섭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이 처음으로 1조원(1조73억원)을 넘긴 스마일게이트는 해외 시장에서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인기 IP인 ‘크로스파이어’를 필두로 ‘로스트아크’ ‘에픽세븐’ 등이 인기를 끌면서 매출의 83.7%를 해외에서 거두고 있다. 이는 넥슨, 엔씨소프트 등이 국내 시장에 편중한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분명한 차별점이다.
스마일게이트는 우리 게임 업계의 취약점으로 꼽히는 콘솔게임 제작에도 몰두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 말 스페인에 신규 스튜디오를 만들어 콘솔게임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올해 ‘크로스파이어X’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콘솔게임기 엑스박스(XBOX)용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드라마와 영화 등 콘텐츠 사업으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7월 중국에서 방영한 e스포츠 드라마 ‘천월화선’은 누적 조회 수 18억 건을 기록했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제작될 영화 ‘크로스파이어’의 배급 계약을 소니픽처스와 맺었다.
카카오게임즈, 공격적 투자…게임 본연 파고드는 펄어비스
카카오게임즈는 M&A로 몸집을 불리는 중이다. 지난해 12월 개발사 넵튠의 최대주주로 올라섰고, 자회사 프렌즈게임즈의 신임 대표로 정욱 넵튠 대표를 선임했다. 7월에는 프렌즈게임즈와 웨이투빗의 합병 절차를 마무리한다. 웨이투빗은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보라’를 운영하고 있으며, 합병 회사는 이에 기반한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 등 신사업 확장을 예고하고 있다.
자회사 카카오VX는 골프 인구의 증가로 매출 성장세가 뚜렷하다. 카카오게임즈가 올해 1분기 기록한 1301억원의 매출에서 14.5%를 담당했다. 주력 사업으로 분류해도 무리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카카오게임즈의 다음 스텝은 모바일 광고 플랫폼 ‘애드엑스’를 향하고 있다. 인수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애드엑스는 네이버, 삼성전자, 넥슨 출신들이 설립한 회사로 코스닥 시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900억원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펄어비스는 게임 본연의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국내 게임 개발사로는 유일하게 자체 게임 엔진(제작 도구)을 보유하고 있다. 동시에 콘솔 시장 공략을 위한 기술 완성도도 높여가고 있다. 신작 ‘붉은사막’은 4K UHD(초고해상도) 게임에 주력하면서 해외 인지도를 높여가는 중이다.
M&A도 게임 개발사를 위주로 추진 중이다. 지난 5월 로스트킹덤을 만든 모바일 게임 개발사 팩토리얼게임즈를 200억원에 인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펄어비스는 ‘검은사막’을 넘어 포트폴리오를 한층 강화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다만 이들 K·S·K·P가 진짜로 3N을 넘어서려면 결국 더 좋은 게임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게임 회사라는 근원적인 위치를 자각하고, 회사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장(중앙대 경영학부 교수)은 “이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대단히 성공을 거둔 1개의 게임에만 의존하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라며 “3N을 넘어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좋은 게임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