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한 수학 퀴즈 중 17마리의 낙타를 세 아들에게 나눠 주는 방법에 대한 문제가 있다. 세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자신이 갖고 있던 17마리의 낙타를 아들들에게 물려주면서, 첫째 아들은 2분의 1, 둘째 아들은 3분의 1, 셋째 아들은 9분의 1로 나눠 가지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들은 어떻게 낙타를 나눠 가져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국제 기업 분쟁을 해결하는 제도인 국제중재가 우리나라 기업들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국제 거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국제중재에 대해 알고 있다. 국제중재는 당사자들의 합의에 따라 당사자들 간의 분쟁을 법원의 재판이 아닌 중재인의 판정에 의해 해결하는 절차를 뜻한다.
최근에는 이런 의미와 다른 방법으로 국제 기업 분쟁을 해결하는 방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 방법은 한국어로는 통상 국제조정이라고 한다. 국제조정의 가장 큰 특징은, 구속력을 갖는 국제중재와는 달리, 당사자들이 합의해야만 결과가 도출된다는 점이다.
국제조정은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합의를 이뤄가야 하므로 그 형태나 내용에 구체적인 제한이 없다. 정치·종교·경제적 원인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분쟁을 해결할 방법으로 사용됐고,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국제조정의 가장 큰 특징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갈등을 조율해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중립적 제삼자(third party neutral)’가 있다는 점이다.
이 중립적 제삼자를 ‘조정인(mediator)’이라고 부른다. 조정인은 판사나 중재인과는 달리 당사자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강제할 수 없다. 당사자들에게 합의를 강제할 수도 없다. 당사자들은 조정인의 도움을 받아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조정인의 경험과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이미 여러 나라의 법원은 소송 시작 전이나 소송 진행 중에 조정을 시도하도록 하는 제도들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도 1990년 민사조정법 제정 이래로 민사 사건들에서 법원이 활발하게 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2020년 법원 연감에 따르면 2019년 전국 1심 법원의 민사 조정 사건 수는 약 6만900건이다.
최근 국제 기업 분쟁에서는 국제조정이 국제 기업 분쟁에 대한 대체적 분쟁 해결 수단으로 점점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유수의 중재 기관들이 고유의 국제조정 규칙을 마련해두고 국제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경우는 아예 국제조정기관(SIMC)을 별도로 설립해 국제중재기관(SIAC)과 함께 중재 진행 중간에 조정을 거치고 성공하는 경우 결과를 판정으로 만들어주는 제도를 운용한다.
국제 기업 분쟁에서 국제중재 기관들이 국제조정 이용을 권유하는 이유는, 조정이 장기간의 심리가 필요한 소송이나 중재보다 훨씬 짧은 기간 내에 종결될 수 있고, 당사자들의 합의로 분쟁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국제조정 기관들의 온라인 조정 사건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이는 조정이 빠른 시간 내에 저렴한 비용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정 과정에서 판결이나 중재판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제3의 해결책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다.
반면, 조정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구속력이 없다는 점이다. 국제조정의 결과로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당사자들이 스스로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다시 소송이나 중재를 해서 이행을 강제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국제조정에 관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협약이 체결됐다. 바로 이른바 ‘싱가포르 협약’이라고 불리는 ‘조정의 결과로 이뤄지는 국제적 화해에 대한 유엔(UN) 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International Settlement Agreements Resulting from Mediation)’이다. 2019년 8월 7일 싱가포르에서 한국을 포함한 46개국이 서명했다. 이 협약에 따라 국제 상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조정 절차를 거쳐 서면으로 작성된 화해계약은 체약국에서 강제집행이 가능하게 됐다.
국제조정의 형태는 다양하고, 방법이 특정돼 있지도 않다. 하지만 주된 방법론으로는 평가식 조정(evaluation mediation)과 촉진식 조정(facilitative mediation)이 있다, 평가식 조정은 조정인이 당사자들의 주장에 대해 평가해주는 방법으로 조정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우리나라 기업들에는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 법원이 조정을 진행하는 방식, 특히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부가 조정하는 방식(수소법원 조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수소법원 조정의 경우, 법원이 승소 가능성에 대한 결론을 어느 정도 내린 상태에서 당사자들에게 양보를 권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당사자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법원이 조정안을 마련해 강제 조정 결정을 하거나 화해 권고 결정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당사자들에게 법원이 제시하는 안으로 조정할 것을 권한다.
촉진식 조정은 조정인이 당사자들의 의사소통을 촉진하는 역할만을 하고 당사자들의 주장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 방식이다. 의사소통을 촉진하는 방법에 제한이 없어서, 조정인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조정이 진행된다. 경험이 많고 조정 성공률이 높은 국제조정인들은 당사자들을 따로 만나서 당사자들의 입장을 자세하게 듣고 상대방에게 전달해도 되는 내용과 전달하면 안 되는 내용에 대해 정확하게 수권을 받은 뒤,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절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렇듯 촉진식 조정 방식으로 이뤄지는 조정에서는 조정인이 양쪽 당사자의 입장을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면서 듣고 쌍방의 접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직접 협상하는 경우보다 성공 가능성이 크고, 당사자들이 소송이나 중재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아서 당사자들의 만족도도 높다.
유연한 결과 도출할 수 있는 촉진식 조정
다시 앞서 언급한 수학 퀴즈로 돌아가 보자. 17마리의 낙타를 그냥 나누는 것으로는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하다. 그래서 세 형제는 마을의 현자를 찾았다. 현자는 사정을 듣고 “내가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나에게도 낙타가 한 마리 있으니 그 낙타를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해보자”라고 권한다. 현자의 낙타 한 마리를 더하면 낙타가 모두 18마리가 되고, 그중 큰아들은 2분의 1인 9마리를, 둘째 아들은 3분의 1인 6마리를, 셋째 아들은 9분의 1인 2마리를 나눠 갖고 나니, 낙타가 한 마리 남게 돼 현자는 자신의 낙타를 다시 돌려받을 수 있었다.
위 문제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열쇠는 바로 현자의 ‘18번째 낙타’였다. 아버지의 유언은 ‘1/2+1/3+1/9’이 1에 미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었고, 그 특징을 파악한 뒤 해결책으로 낙타를 제공한 것이 현자의 촉진식 조정에 해당하는 것이다. 반면, 9마리, 6마리, 2마리로 낙타를 나눠 가진 형제들은 각각 17마리에 대한 정확한 ‘1/2, 1/3, 1/9’보다는 약간씩 더 많은 지분을 갖게 됐는데, 각자가 온전한 낙타를 갖게 되는 이상, 각자가 추가로 받게 되는 지분이 유언에서 정한 비율과 정확히 맞는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이 부분은 당사자들이 충분히 양보할 수 있는 차이에 불과했던 것이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경험 많은 국제조정인들은 각 분쟁에서의 ‘18번째 낙타’를 찾아내어 합의를 유도한다. 국제 분쟁 조정에서는 분쟁 당사자들이 서로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 문화적 차이에서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바로잡아 주기만 하더라도 합의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특히 촉진식 조정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국제 분쟁을 신속하고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국내 소송 사건을 통해 어느 정도 조정에 익숙한 한국 기업들이 이제 국제 분쟁에서도 국제조정을 활발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