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틈새시장에서 시작해 뉴욕증시까지 상장한 패션 기업이 있다. 플러스 사이즈(기성복 표준 치수보다 더 큰 치수) 여성들을 위한 의류, 수영복, 신발 등을 디자인·상품화하는 ‘토리드(Torrid)’다. 토리드는 7월 1일 뉴욕증시에 21달러(약 2만5000원)로 상장한 첫날 13% 급등했으며, 8월 16일 현재 30.64달러(약 3만6500원)를 기록했다.
토리드는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탄생했다. 미국 패션 브랜드 업체 핫토픽(Hot Topic)은 ‘맞는 옷이 없다’는 고객들의 불만에 자회사 토리드를 선보였다. 엑스스몰(0)부터 라지(10~12)를 입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존 패션 브랜드들의 틀을 깨고 10~30사이즈 고객들의 의류와 속옷, 액세사리를 판매한다.
토리드는 그간 여성 빅사이즈 의류 업체들이 선보여온 ‘무난한 스타일’을 탈피했다. 핫토픽은 젊은 비만 여성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이들이 몸매를 감춰주는 넉넉한 옷보다 화려하고 유행하는 옷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토리드는 세련되고, 유행에 맞는 플러스 사이즈 의류와 액세서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자신감과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의류를 선보인 토리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2013년 사모펀드사 시카모어 파트너스에 인수된 토리드는 2015년 지주사가 됐다. 토리드는 현재 608개 매장을 운영 중이며, 지난해 기준 활성 고객 수만 320만 명에 이른다. 토리드의 2015~2020년 연평균 순매출 성장률은 17%였으며, 지난해 매출은 9억7350만달러(약 1조1600억원)를 기록했다.
“뚱뚱해도 괜찮아”… 패션을 바꾸다
토리드의 질주 뒤에는 최고경영자(CEO)인 리즈 무뇨스(Liz Munoz)가 있다. 라틴계 여성인 그는 2010년 토리드에 부사장으로 입사해 8년 만에 대표이사 및 사장에 올라섰다. 그는 어린 시절 남들보다 큰 몸집에 옷을 구매하기 어려웠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토리드의 의류 제작에 힘을 쏟았다.
리즈 무뇨스는 자칭 ‘빅 걸(Big girl)’이다. ‘당신에게 맞는 옷이 없다’는 점원의 대답을 듣기 부끄러워서 의류 매장에 들어설 때마다 아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는 게 일상이었다. 신체 사이즈와 연령대에 맞는 옷을 찾기 어려워 10대 때부터 직접 바느질해서 옷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각종 무도회 의상과 웨딩드레스까지 직접 제작해야 했다.
어릴 적 시작한 바느질은 패션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FIDM대학에서 패션을 공부했고, 졸업하자마자 미국의 청바지 전문 브랜드인 봉고진에서 일하게 된다. 이후 청바지 브랜드 럭키브랜드 사장을 거쳐, 토리드에 부사장으로 입사하게 된다. 리즈 무뇨스는 “의류 업계에서 가장 무시당했던 고객을 위해 일한다는 점이 내게는 큰 영광이었다”며 “토리드라는 브랜드에 매료돼 직급을 낮춰 이직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느낀 토리드의 매력은 ‘마네킹에 맞춰 옷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몸에 맞춰서 디자인한다’는 점이다. 리즈 무뇨스는 편안하고 기능적이지만 스타일리시한 옷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잡고, ‘핏(fit·형태)’에 공을 들였다. 직접 옷을 입어보고, 핏과 패턴, 스타일을 변형하는 작업을 했다. 한 해 동안 15만 벌이 넘는 옷을 입어보고, 하루에 100벌이 넘는 옷을 제작하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토리드 제작 의류를 입은 자신의 사진을 지속해서 올리고,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파했다. 토리드 광고·마케팅에 참여한 플러스 사이즈 모델 바비 페레이라와 애슐리 그레이엄, 배우 레벨 윌슨, 에이드리엔 C. 무어 등도 긍정적인 메시지에 힘을 더했다. 리즈 무뇨스는 또 고객들의 SNS 활용과 로열티 프로그램 참여도를 높이고, 고객 데이터를 축적해 고품질 상품을 제조·판매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리즈 무뇨스는 고객들이 온·오프라인, 모바일 등 다양한 경로를 넘나들며 상품을 검색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옴니채널’ 서비스를 구축했다. 지난해 토리드 고객의 70%가 온라인에서 토리드 의류를 구매했다. 하지만, 반품률은 타 경쟁 업체 평균(30%)의 3분의 1도 안 되는 9%에 그쳤다. 어니스트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5월 플러스 사이즈 여성 의류 시장 내 토리드의 점유율은 50%를 기록했다. 경쟁사인 레인 브라이언트, 우먼 위딘, 디아앤드코 등을 크게 따돌린 것이다.
토리드는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움직임인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ity)’와 플러스 사이즈 인플루언서(SNS에서 영향력이 있는 개인) 덕도 볼 것으로 기대된다. 리즈 무뇨스는 “미국 여성 10명 중 7명이 플러스 사이즈(10 이상)지만, 대부분의 패션 업체는 여전히 나머지 3명에게만 집중한다”며 “기회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토리드에 따르면, 현재 미국 여성 플러스 사이즈 의류 및 속옷 시장 규모는 850억달러(약 100조원)로, 9000만 명의 잠재 고객이 있는 상황이다. 데이터 분석 플랫폼 에디티드는 2027년까지 이 시장이 6970억달러(약 828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리즈 무뇨스는 “상장 자금을 활용해 매장을 연 25개씩 개점하고, 브랜드 마케팅, 신상품 개발 등을 통해 플러스 사이즈 의류·속옷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엔젤은 없다”…빅토리아 시크릿의 ‘변심’
‘섹시한 속옷’의 대명사 빅토리아 시크릿도 시대 변화에 맞춰 브랜드를 완전히 탈바꿈하고 있다. 미국 여성 속옷 시장 내 빅토리아 시크릿의 점유율이 2015년 32%에서 2020년 21%로 급락하자, 뒤늦게 변화를 선언한 것이다. 마틴 워터스 빅토리아 시크릿 CEO는 올해 2월 “세상이 변화하고 있을 때 우리의 대응이 너무 느렸다”며 “이제는 남성이 원하는 것보다는 여성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2000년대 초반 여성들이 가장 많이 찾는 속옷 브랜드였다. 1995년부터 시작된 빅토리아 시크릿의 패션쇼에는 지젤 번천이나 타이라 뱅크스, 하이디 클룸 등 최정상급 8등신 모델들이 커다란 날개를 달고 ‘엔젤(Angel)’로 출연했다. 여성의 성적 매력을 극대화한 마케팅으로, 남성이 원하는 판타지를 속옷에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10년 이후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운동이 젊은층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빅토리아 시크릿의 시대는 저물어갔다. 많은 경쟁자가 다양한 체형에 맞는 속옷, 편안함에 초점을 맞추자 섹시 마케팅을 하는 빅토리아 시크릿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 2018년 73억달러(약 8조6700억원)였던 매출은 2020년 54억달러(약 6조4000억원)로 급감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경영진을 전면 교체했고,브랜드 이미지 개편에도 나섰다. 먼저 빅토리아 시크릿은 올해부터 엔젤과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모델을 선정하고 있다. 지난 6월 선정한 홍보대사는 미국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이자 동성애자, 브라질 출신의 성전환자, 수단 난민 출신 모델, 사진작가 겸 기자, 통통한 사이즈의 모델, 인도 출신 배우이자 정보기술(IT) 기업 투자자, 중국계 스키 선수 등이다.
매장 분위기와 판매 상품도 전면적으로 바꾼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전 매장에 플러스 사이즈 마네킹을 추가하고, 어두운 매장 인테리어와 조명을 밝은 분위기로 전환했다. 또 임산부 속옷과 산후 기능성 보정 속옷, 스포츠용 속옷 및 수영복 분야로 영역을 확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