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석 대성창업투자(대성창투) 이사는 이른바 ‘성덕(성공한 덕후의 줄임말로, 좋아하는 일로 성공한 사람을 가리키는 신조어)’이다. 컴퓨터가 아직 대중화하지 않았던 1990년대 초부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웠으며, 벤처 붐이 절정에 달했던 2000년 대학생이 돼 IT 산업의 격변을 몸소 체험했다. IT 업체에서 병역 특례로 복무하며 프로그래밍을 계속한 허 이사는 결국 게임 개발사를 거쳐 대성창투에 둥지를 틀고 IT 분야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허 이사는 2015년 대성창투에 합류한 이래 괄목한 이력을 쌓았다. 심사역이 되고 가장 먼저 투자한 회사가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개발하는 크래프톤이었다. 크래프톤 투자를 통해 대성창투에 130배(지분 희석을 반영하지 않은 수치)의 수익을 안겨줬다.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로부터 투자받은 뤼이드,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된 래디쉬에도 초기 투자했다. 뤼이드와 래디쉬의 투자 수익은 지분 희석을 배제하고 각각 50배, 10배에 육박한다.
얼마 전 서울 역삼동 대성창투 사무실에서 허 이사를 만나 투자 비화와 철학 등을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15년 벤처캐피털(VC)에 입사하기 전까지 어떤 일을 했나
“2002년 말 디지털매트릭스라는 회사에서 병역 특례를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모바일 바코드를 이용해 잠실종합운동장잠실야구장의 티켓 예약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은행에 다녔지만 모바일 산업에 대한 동경 때문에 결국 카이스트 경영학 석사(MBA)를 거쳐 게임빌로 이직했다. 당시 게임빌은 컴투스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로, ‘별이되어라’와 ‘서머너즈워’ 같은 모바일 게임들을 서비스하며 급성장하고 있었다.”
VC로 이직하게 된 이유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워낙 좋아했던 데다 벤처 붐을 지켜본 세대였기에, 컴퓨터나 모바일 분야의 벤처기업을 직접 창업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은행과 게임 회사에 다니면서도 언젠가 창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직접 회사를 경영하지 않더라도 창업가들을 위해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VC에서 일하고 있다.”
대성창투에 합류한 뒤 가장 먼저 투자한 회사는 어디였는지
“입사하고 나서 1년이 조금 안 돼서 크래프톤(옛 블루홀스튜디오)에 투자했다. 당시 크래프톤은 PC 게임 ‘테라’를 서비스하다가 모바일 게임 개발사 펍지스튜디오(옛 지노게임즈)를 인수하며 모바일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배틀그라운드는 아직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신작에 불과했다. 마침 크래프톤의 구주를 팔고자 하는 기관이 있길래 좋은 기회다 싶어 바로 인수했다. 기업 가치는 공모가 기준으로 130배 정도 올랐다. 지분 희석을 고려하면 약 100배의 수익이 났다.”
당시 크래프톤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 안다
“게임빌에서 일할 때부터 크래프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크래프톤에서 만든 모바일 게임 ‘데빌리언’을 게임빌에서 퍼블리싱(판매)했기 때문이다. 당시 잘나가던 대부분의 게임사들이 투자나 인수를 통해 성장하거나 지식재산권(IP) 사업에 무게를 둔 반면, 그때부터 크래프톤은 ‘개발사’라는 방향성을 굉장히 강조했다. 또 남들과 똑같은 게임을 양산해서 매출을 내기보다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자는 포부가 뚜렷했다. 크래프톤은 그 점에서 동시대 ‘잘나가던’ 다른 게임사들과 달라 보였다. 대성창투에 온 뒤 크래프톤에 투자할 기회를 얻었지만, 회사가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영역을 확장하며 부침을 겪던 시기다 보니 투자심의위원회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그런 부침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당연히 겪어야 할 진통이라고 생각했다.”
크래프톤은 허 이사에게 큰 의미가 있는 회사일 것 같다
“게임 회사에 대한 투자 성공 확률은 게임 성공 확률과 비슷하다. 그만큼 성공하기 어려운 분야다. 만약 첫 투자가 실패로 이어졌다면 이후 게임 회사에 계속 투자하기 어려웠겠지만, 다행히도 잘되는 바람에 게임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그 덕에 시프트업, 엔젤게임즈, 앤유, 유티플러스 인터랙티브와 빅픽처인터렉티브 등 잠재력 있는 게임 회사에 대한 투자를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비전펀드가 투자한 뤼이드에도 초기 투자한 것으로 알고 있다
“2017년에 투자했다. ‘산타토익’이 아직 베타 서비스를 하던 시기였다. 장영준 대표는 내가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창업가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뤼이드를 창업한 후, 서창호 카이스트 교수 등 유명한 인공지능(AI) 전문가들을 계속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해 결국 AI 엔진을 기반으로 산타토익을 만들어냈다. 장 대표는 특히 커뮤니케이션(소통) 능력이 뛰어난 창업가라고 생각한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먼저 좋은 인재를 확보해야 한다. 뛰어난 AI 엔지니어들을 설득해 회사에 합류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 투자자와 파트너사들을 설득해 자신의 비전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야만 한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된 래디쉬에도 초기 투자해 10배 넘는 수익을 올렸다
“드라마나 영화, 게임은 제작에 굉장히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투자를 받기가 쉽지 않은 분야다. 다만, 이미 흥행에 성공한 웹툰이나 웹소설을 소재로 콘텐츠를 제작한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투자 유치가 쉬워진다. ‘재료’가 될 수 있는 원천 콘텐츠의 중요성이 그만큼 큰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원천 소스가 될 수 있는 웹소설이나 웹툰 산업에 큰돈이 몰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해 2019년 래디쉬에 투자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매출이 발생하지 않던 시기였다.”
뛰어난 창업가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자질은
“소통을 잘하고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잘 끌어내며 비전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빠른 속도로 실행하는 능력이다. 스타트업은 속도가 생명이다. 대기업보다 경쟁 우위가 있는 유일한 강점이 바로 속도다. 창업가가 빠른 속도로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스타트업이 한두 번 시도해볼 시간에 서너 번 시도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좋은 성과를 낼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게 된다. 좋은 아이템이 있다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무조건 ‘시도’만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매 시도에서 고칠 부분을 찾아내 개선해나가며 완성도를 높여나가야 한다.”
VC에서 일하기 희망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투자를 통해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여러 상황과 여건이 잘 맞아떨어졌을 때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감사하게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투자한 회사 중에는 어려워져 문을 닫은 곳도 있다. 그럴 때는 멘털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 시기를 잘 견뎌내기 위해서는 내가 왜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일하는지 명확한 이유를 갖고 있어야 한다. 성과나 보상만 바라보면 힘든 시기에 버틸 동력이 없다. 나는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사회의 다양성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창업이 계속 이뤄지지 않으면 사회는 획일화하고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투자업의 의미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보고 명확한 목표를 갖고 꾸준히 투자하다 보면, 결국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