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혁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있다. 요즘에는 예술적인 완성도가 좀 떨어지더라도 재미가 있으면 모든 게 용서된다. 더구나 이 드라마는 외딴섬이라는 어떤 가상의 공간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펼쳐지기 때문에 개연성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일종의 성인용 잔혹 동화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동화 ‘신데렐라’에서 주인공의 의붓언니들이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가락을 자르거나 혹은 발뒤꿈치를 자른다고 리얼리티를 문제 삼지 않는다. 언니들이 비둘기에게 눈이 쪼이는 벌을 받아도 오히려 통쾌해한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주인공 남매가 마녀를 화덕에 밀어 넣어 죽인다고 잔인하다고 책망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진화심리학자 더글러스 켄릭 등에 의하면 사람들은 크게 7~8가지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고(안전 본능), 질병을 피하고 싶어 한다(건강 본능). 사람들은 어떤 때는 협력하고(협력 본능), 어떤 때는 경쟁한다(경쟁 본능). 또한 강렬한 자극을 추구하기도(자극 추구 본능) 하고, 배우자를 찾거나(짝 획득 본능) 혹은 착한 배우자로서 가정을 꾸리기도(짝 유지 본능) 한다. 자신의 아이나 조카, 손주, 반려동물 등을 돌보는 본능(친족 보살핌 본능)도 있다.
데스 게임을 소재로 한 흔한 영화 중의 하나일 수도 있었던 오징어 게임이 흥행에 성공한 근본 원인으로 탁월한 심리 묘사를 빼놓을 수 없다. 오징어 게임은 앞에서 말한 인간의 여러 가지 본능을 대표하는 캐릭터들을 적절하게 선정해, 그들 간의 조화와 갈등 관계를 통해 인간의 심층 심리를 다이내믹하게 풀어낸다.
먼저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분)은 공고를 나와 자동차 회사에 취직했다가 구조조정 된 사람이다. 실직 후에 치킨집, 분식집 등을 했지만 망해서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이혼까지 당했다. 지금은 어머니 집에 얹혀살지만 경마 도박에 빠져있다. 빚쟁이에게 신체포기각서까지 써주는 등 벼랑 끝에 몰린 기훈에겐 이 데스 게임이 마지막 탈출구다.
기훈은 ‘협력 본능’을 대표하는 따뜻한 캐릭터다. 어쩌다 막장 인생으로 전락했지만, 목숨을 건 데스 매치에서도 오일남(오영수 분)이나 강새벽 같은 노약자나 여성을 배려할 줄 안다. 물론 구슬치기에서는 ‘안전 본능’에 사로잡혀 오일남을 속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반면 기훈과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서울대 경영학과에 수석 입학하고 엘리트 금융인이 된 조상우(박해수 분)는 ‘경쟁 본능’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그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지만, 회삿돈을 횡령해 투자했다가 쫄딱 망했다.
조상우는 자신의 생존과 게임의 승리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다. 구슬 게임에서 알리를 속여 그를 죽게 만든 것, 징검다리 게임에서 앞사람을 밀어버리거나, 부상당한 강새벽을 서슴지 않고 죽인 것 등이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게임을 주최한 오일남은 뇌종양을 앓고 있다. 엄청난 재력가이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다. 기훈과 달리 엄동설한에 길가에 쓰러져 있는 노숙자를 누구도 돕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삶에 대한 재미도 없다. 그가 데스 게임을 벌인 까닭도, 또 그 게임의 관중이 아니라 직접 게임에 참여한 것도, 오직 ‘재미’라는 자극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오일남은 최종 승자로 살아남은 성기훈을 그의 거처로 초대한다. 기훈은 왜 이런 무자비한 데스 매치를 계획했냐고 따진다. 그러나 일남의 대답은 허무하다. “너희들은 그저 내가 만든 게임의 말에 불과했어!” 일남은 동화 속의 마녀와 같은 캐릭터다.
기훈은 주최 측에 항변한다. “잘 들어, 나는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궁금해, 너희들이 누군지, 어떻게 사람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난 용서가 안 돼.” 기훈이 협력 본능의 상징이라면, 오일남은 오직 재미를 위해 게임을 벌이는 ‘자극 추구 본능’의 화신이다.
기훈-상우-일남으로 대표되는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강새벽과 지영, 알리가 있고, 장덕수와 한미녀 등의 조연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목숨을 건 경기에서 작중 인물들에게 이 외딴섬은 바깥의 현실 세계나 다름없는 지옥이다. 그들은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자발적으로 죽음의 경기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들은 삶의 벼랑 끝에 섰다는 것 말고도 한결같이 ‘가족이 있는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동일한 꿈을 꾼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만나지 못하거나, 만날 형편이 아닌 것이다.
성기훈은 이혼남이고 그의 아내는 딸을 데리고 재혼했다. 그에게 처자식이 기다리는 따뜻한 집은 없다. 병든 홀어머니만 그를 기다릴 뿐이다. 조상우도 노총각이고 개인 파산으로 인해 홀어머니에게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오일남도 임종 자리를 지켜줄 가족조차 없다. 탈북자인 강새벽은 남쪽에 남은 가족이 오직 동생 강철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부모 형제나 자식, 조카 등을 돌보거나 돌봄을 받으려는 친족 보살핌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집으로 돌아가야만 가능하다. 게임 중에 기훈과 상우는 이런 대화를 한다. “상우야! 우리 여기서 게임 끝내고 집으로 가자!” “형! 어릴 때 이러고 놀면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 이젠 아무도 안 부르네!”
그리고 마지막 결투에서 자살을 택한 상우가 한 부탁도 “엄마를 돌봐 달라!”는 것이었다. “형! 우리 엄마··· 우리··· 우리 엄마.” 강새벽에게 승리를 양보한 지영도 이렇게 말한다. “넌 여기서 나갈 이유가 있지만 난 없어!” 지영은 자신을 성폭행하고 엄마를 살해한 아빠를 죽인 전과자이기 때문이다. 강새벽 역시 죽어가면서 성기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저씨! 나 집에 가고 싶어!”
그들은 돌아갈 가족이나 집이 없어도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인류의 가장 오랜 집단인 가족, 그 가족이 모여 사는 집이 우리에게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 속의 다양한 장치와 컬러풀한 배경,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외국인에겐 이국적인) 옛날 게임 등이 극에 재미를 더하고 흥행에 플러스 요인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인간의 본능, 특히 가족과 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친족 보살핌 본능’을 밑바닥에 깔고 그 외 다양한 본능을 심층적으로 터치한 것이 보이지 않는 최대의 흥행 요인이 아니었을까? 장기판의 졸(卒) 혹은 체스판의 말과 같은 기훈이나, 오일남과 같은 거부(巨富)에게도 인간의 본능은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니 말이다.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