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 3곳을 설립함으로써 더 높은 경영 집중도와 자원 배분, 전략적 유연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로런스 컬프(Lawrence Culp) 제너럴 일렉트릭(GE) 최고경영자(CEO)는 11월 9일(이하 현지시각) 회사를 항공·헬스케어·에너지 등 3개 사로 분할한다고 발표했다. 컬프 CEO는 이번 결정에 대해 “GE의 부채를 줄이고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충분히 진행됨에 따라 올해 봄부터 분할 계획을 고려해 왔다”며 “(회사) 분할은 사업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며, 우리의 기술 전문성과 리더십을 통해 고객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GE는 2023년 초까지 헬스케어 부문을, 2024년 초까지 재생에너지와 전력, 디지털 사업 등을 포함한 에너지 부문을 분리한다. 분할 작업을 마치면 GE는 항공 사업만 운영하면서 헬스케어 부문의 지분을 19.9% 소유하게 되며, 제트 엔진 제조와 항공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집중할 전망이다. 컬프 CEO는 항공 사업 부문 대표직을 유지하며 헬스케어 부문의 비상임 의장을 맡는다.
이번 회사 분할의 주역인 컬프 CEO는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2018년 영입됐다. 그는 GE 130여 년 역사상 최초의 외부 출신 대표다. 같은 해 GE는 111년간 지켜왔던 뉴욕증시 다우지수의 유일한 원년 멤버라는 타이틀을 지키지 못하고 탈락했다. 벼랑 끝에 몰린 GE는 경영 사관학교로 불리는 크로톤빌연수원을 통해 키운 내부인을 CEO로 선임하던 관례를 깨고 미국 산업 의료기기 회사 다나허 CEO 출신 컬프를 데려왔다.
컬프 CEO는 미 워싱턴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비즈니스스쿨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은 후 1990년 다나허에 입사, 2001년 37세 나이로 다나허 CEO 자리에 올랐다. 이후 그가 재임한 14년 동안 회사는 급격히 성장했다. 해당 기간 다나허의 매출과 시가총액은 각각 200억달러(약 24조원), 500억달러(약 60조원)로 5배가량 늘었으며, 컬프 CEO는 성과를 인정받고 2009년 1억4100만달러(약 1692억원)의 보수를 받아 당시 ‘미국 연봉왕’에 올랐다. 그는 다나허에 일본 도요타의 가이젠(개선) 시스템을 도입해 성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가이젠은 제조 과정 혁신과 비용 절감, 재고 관리 등 효율성과 성과에 집중하는 혁신 프로그램이다.
컬프 CEO는 취임 직후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GE의 고질적인 관료 문화를 정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그는 2023년까지 부채를 총 950억달러(약 114조원)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GE의 사업을 정리하며 회사 구조를 단순화하는 데 주력했다. GE의 성장 전략이었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역효과를 냈다는 판단에서다. 본사 직원 수를 줄이며 인력 감축에 나섰고, 지난해에는 129년 만에 전구 사업을 매각했다. 올해 3월에는 항공사 리스 사업을 라이벌 업체 에어캡에 매각했다. GE는 그의 성과를 인정해 CEO 계약 기간을 2024년 8월까지로 연장했다.
‘에디슨의 GE’ 문어발식 확장이 부메랑으로
GE는 미국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1892년 공동 창업한 회사다. 전기 조명 기업으로 시작한 GE는 생활가전, 제트엔진, 발전용 터빈, 첨단 의료기기,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2000년대 초반 기업 가치가 6000억달러(약 720조원)에 달하는 전 세계 1위 몸값의 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성장 동력이었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은 결과적으로 GE의 발목을 잡았다. 제조업 부문의 혁신적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는 줄이고 금융사 GE캐피털을 중심으로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GE캐피털의 자금 조달에 문제가 생기며 직격탄을 맞았다. 이후 GE는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에 애플, 구글 등 대형 정보기술(IT) 기업의 급성장으로 제조업이 산업 중심에서 밀려나며 GE의 입지는 더 좁아졌다.
GE의 시가총액은 11월 15일 기준 약 1171억달러(약 140조5200억원)다. 미국에서 가장 몸값이 높았던 시절인 2000년(약 5883억달러) 대비 5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2008년 1800억달러(약 216조원)가 넘었던 매출은 지난해엔 796억달러(약 95조5200억원)로 13년 만에 절반 넘게 줄었다. 주가도 2009년 이후 연평균 2%씩 하락했다.
결국 GE는 구조조정에 돌입했지만, 전성기 수준으로 회사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17년 8월 CEO에 오른 존 플래너리는 최고재무책임자(CFO) 등 사내 이사 절반을 교체한 데 이어 기업문화를 바꾸고, 자산을 매각·분사하겠다는 계획을 내놨지만, 성과가 좋지 못해 1년여 만에 경질됐다. 이후 영입된 컬프 CEO는 강력한 몸집 줄이기를 단행, 결국 회사 3분할을 결정했다. 조지프 오데아 웰스파고 애널리스트는 “이번 조치로 일회성 비용은 발생하겠지만, 분할된 3개 회사는 민첩한 사업 운영으로 이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J&J·도시바도 ‘기업 분할’⋯“대기업의 종말”
“그 대기업(GE)은 죽었고, 이것(기업들의 분할)은 대기업의 종말이다.”
글로벌 대기업들의 잇따른 회사 분할 결정에 대한 빌 조지 하버드비즈니스스쿨 선임 연구원의 평가다. 미국 제약사 존슨앤드존슨(J&J)은 11월 12일 소비자 건강제품 부문과 제약·의료장비 부문 등 2개 회사로 분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GE가 회사 분할을 결정한 지 사흘 만에 나온 발표다. 알렉스 고키 J&J CEO는 성명을 내고 “이사회와 경영진은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이번 분사가 환자, 소비자, 보건의료 전문가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실적 성장과 전 세계 인류를 위한 의료적 성과를 향상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J&J는 앞으로 소비자 건강제품 부문과 제약·의료장비 부문 등 2개 회사로 나뉠 예정이다. 소비자 건강제품 부문으로는 밴드에이드 반창고, 타이레놀, 구강청결제 리스테린, 스킨케어 브랜드인 아비노와 뉴트로지나 등이 떨어져 나간다. 새 회사 이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존슨앤드존슨 사명을 잇는 제약·의료장비 부문에는 처방 약과 의료장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사업 등이 포함되며, 내년 1월 취임 예정인 호아킨 두아토 CEO가 회사를 맡는다.
앞서 일본의 종합전기 업체인 도시바(東芝)도 11월 12일 4~9월(반기) 실적 발표회에서 회사를 인프라, 디바이스, 반도체 메모리 등 3개 분야로 나눈 뒤 상장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도시바 본사는 반도체 대기업인 키오시아 홀딩스 등의 주식을 보유한 회사로 존속하고, 발전 등 인프라 서비스 사업과 하드 디스크 등 디바이스 사업은 독립시키는 방식이다. 도시바는 이후 2023년 하반기까지 상장을 완료한다는 구상이다. 쓰나가와 사토시 도시바 사장 겸 CEO는 “지난 5개월간 모든 옵션에 대해 논의를 거듭한 결과, 전략적 재편이 최선이라고 결론 내렸다”며 “분할은 해체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진화”라고 했다.
글로벌 대기업들의 기업 쪼개기가 잇따르며 제조 기반 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 시대가 끝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CNN 비즈니스는 “기업 경영진과 이사회는 거대 복합기업의 형태로는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앞으로도 거대 복합기업들의 기업 분할이 잇따를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