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슈라이어는 서울 가회동의 현대 디자인 라이브러리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다. 중정이 딸린 작지만 매력적인 공간에서 최근 발간된 그의 책 ‘디자인 너머’ 전시가 열리고 있다. 늘 그렇듯 검은 옷에 검은 안경을 쓰고 밝게 웃으며 곁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샤프펜슬로 즉흥적인 스케치를 만들어낸다. 마치 손끝에 뇌가 달린 것 같다.
지난 2006년부터 현대자동차그룹에 조인한 이 자동차 디자인계의 거장은 유명한 호랑이코 그릴과 ‘K시리즈’ 등 히트작을 내며 세계 시장에서 기아차의 위상을 단번에 끌어올렸다. 아우디와 폴크스바겐에서 TT, A3, A6, 뉴비틀, 골프4 등의 유려한 디자인을 만들어냈던 유럽인의 감성이 기아와 현대차에 융합되는 과정은 경이롭다.
2018년부터 현대자동차그룹의 디자인경영 사장으로 활약했던 피터 슈라이어를 최근 만나 혁신의 힌트를 들었다. 중요한 대화의 마디마다 정의선 회장의 이름이 호명됐다. 마치 인터뷰 테이블에 정 회장이 동행한 듯한 기분이었다. 취향과 비전이 같은 두 사람의 격의 없는 협업이 이 몸집 큰 제조업을 빠르고 진취적인 미래 산업으로 탈바꿈시킨 주요 엔진인 듯했다.

수시로 연필을 사용하는 이유가 손끝의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인가. 디자이너는 좋은 공간, 좋은 디자인을 눈보다는 피부로 느낀다고 알고 있다.
“연필의 감각은 내게 매우 중요하다. 끄적끄적 어떤 형태가 나올지 모르는 채로 하는, 그런 스케치를 좋아한다. 컴퓨터는 완성을 지향하는 기계다. 빠르고 첨단이고 다른 디자이너와 협업할 때 필수적이지만, 혁신은 손끝에서 나온다.”
자동차는 우리를 직접 경험의 세계로 이끌어내고 있는 최전선의 모빌리니티라는 점에서 몸의 상상력, 촉각의 감각을 구현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잠잠히 생각하다) 그래서 나는 해 질 녘에 불을 끄고 차를 비춰보는 걸 좋아한다. 커다란 거울에 바퀴를 달아 자동차 주위를 움직일 수 있게 해두었다. 해가 지면 조명이 달라지고 도시마다 드라이빙 경험이 달라지니, 그 변화를 상상해본다. 개인적으로 터치스크린보다 버튼 조작을 좋아한다.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몸의 움직임이 느껴지도록 디자인하려고 한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일할 때도 상호작용의 감각을 중요시한다고 들었다. 팀을 꾸리면 가장 먼저 오디오와 에스프레소 머신을 함께 사러 간다고.
“일터에서 나누는 우정과 경험을 놓치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뭘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보고 들어야 새로운 게 나온다. 팀은 재즈밴드나 축구팀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섞여서 아이디어를 내고, 패스를 주고받고 즉흥 연주하듯 발전시키는 거다.”
당신 취향 안에도 여러 예술가 동료들이 공존하더라. 예술가로서의 피터와 산업디자이너로서의 피터가 충돌하진 않나.
“예술과 디자인이 다른 영역인 건 맞다. 디자이너는 솔루션을 찾고 아티스트는 질문을 던진다. 아티스트는 도발을 한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연구해야 한다. 다른 예술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과물을 내놓는지. 나는 마일드 데이비스의 음악에서 디자인 영감을 많이 받는다. 그의 음악은 재즈를 발명한 느낌을 준다. 재즈와 펑크를 섞는다든지, 여러 장르를 섞어서 뉴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아티스트가 융합의 모델인가.
“그렇다. 가령 사이 트윔블리의 그림은 생각과 감정의 융합이다. 그런데 많은 분이 ‘우리 아이가 해도 저 낙서만큼은 하지’라고 한다. 대기업에서 타 부서 사람들이 디자이너에게 종종 하는 말이 그거다(웃음). 잘 모르면 쉽게 보이는 법이다. 사이 트윔블리는 언어를 페인팅으로 보여줬다. 어디로 갈지, 자기 생각의 길을 개척했다.”
당신이 제시한 기아의 ‘직선의 단순함’도 그렇게 나왔나? 종이 위에 그린 선 한 줄이지만, 혁신의 가이드라인이 됐는데.
“그렇다. ‘직선의 단순함’은 디자인 레시피가 아니라 철학,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고객과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정직하게 직관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방향이다. 정의선 회장이 이런 추상적인 철학을 이해해줬다.”
정의선 회장과 당신은 어떤 점이 닮았나.
“(오래 생각하다) 딱 짚어 얘기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이해했다. 상호 신뢰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 설득했고, 그는 허용했다. 운 좋게도 좋은 시기에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현대를 조약돌에, 기아를 당구공에 비유한 ‘정체성 선언’은 어떻게 나왔나.
“정의선 회장과 대화를 하다가 나왔다. 회장이 먼저 꺼냈는지, 내가 먼저 질문했는지는 모르겠다. 현대는 물방울의 생명감이 있고 기아는 눈 결정체 같은 구조적인 면이 있다고 했다. 거기서 두 기업의 정체성이 분명해졌다. 현대차는 조약돌처럼 통일감이 있지만, 똑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다. 반면 기아차는 사람이 만든 정확성과 정교함이 두드러진다. 그 차이를 선언문으로 만들어서 구성원들과 공유했다.”
브랜드의 시작은 항상 디자인인가.
“그렇다. 그걸 나는 아우디에서 배웠고 폴크스바겐에서 배웠다. 그 당시 아우디는 좋은 차였지만 중립적이었고 개성이 없었다. 정체성이 없으면 바깥세상에 나갔을 때 묻힌다. 뚜렷한 특징을 만들어내야 한다. TT는 아우디의 이미지를 단번에 바꿨다. 기아도 디자인 혁신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시장에 빠르게 어필할 수 있었다.”
혁신의 와중에 난관은 없었나.
“(미소 지으며)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은 늘 어렵다. 의사결정할 때 늘 부담을 느낀다. 가령 세 개의 디자인팀이 경쟁을 했다면, 선정되지 않은 나머지 팀에 결과를 통보하는 게 어렵다. 안 좋았던 게 아니라, 더 적합한 게 있었을 뿐이니까. 실패한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요즘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나.
“탈것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 소유 차량과 공유 차량, 다양한 모빌리티의 니즈를 보고 있다. ‘도시인이 꼭 자가용을 소유해야할까’ 하는 질문도 하면서.”
미래를 내다보고 현재의 시스템을 재조정하는 건 기업 입장에서 큰 도전이다. 가솔린 엔진 차량을 단계적으로 폐기하기로 한 결정에, 아쉬움은 없었나.
“내가 자랐던 문화는 가솔린 엔진의 시대였다. 화석연료를 태우고 시끄러운 엔진음과 배기관이 필수인 시대. 아쉬움은 있지만, 전기차의 장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론이다. 지금 나오는 전기차들을 보라. 얼마나 조용하고 깨끗한가? 수소차의 폐기물은 수증기뿐이다.”
자동차 제조업에서 모빌리티 기업으로의 전환은 언제부터 생각했나.
“5~6년 전부터 구체화시키고 있다. 지속 가능성이 남용되고 있지만, 나에게 지속 가능성은 오래된 옷과 같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항상 기술과 복잡성의 전면에 나와 있다. ‘예쁘게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지구의 에너지 생산과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깊은 프로세스다.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
현대는 올해 전 세계 수소차 시장에서 50%를 웃도는 점유율로 판매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내연기관차와 수소차를 디자인하는 건 어떻게 다른가.
“기반 시설이 계속 갖춰지면서 수소차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나는 수소차 넥쏘를 오래 운전하면서 연료적인 시스템(30분 충전에 600㎞ 주행)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일단 배터리를 바닥에 넣으면 나머지는 빈 곳이다. 가솔린 차는 엔진, 기어박스, 연료 탱크 등 위치가 정해져 있어서 운신의 폭이 좁지만, 전기차, 수소차는 디자이너가 배치하기 나름이다. 앞으로 자율주행이 보편화되면 핸들을 접어서 밀어 넣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도록 할 수도 있다.”
모빌리티의 변화에 맞게 도심의 디자인도 바뀌겠군.
“그렇다. 차를 타고 자율주행하다가 막히면 공유 스쿠터로 갈아타고 또 어느 지점에선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2028년 항공 택시 목표)로 환승할 수도 있다. 현대차는 차량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의 모빌리티 디자인을 그려 가고 있다.”
유럽과 미국 중심이었던 자동차 시장에서 앞으로 한국 차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까.
“디자인 분야에 있어서는 이미 그렇게 됐다. 한때 한국 차가 다른 차의 카피였던 시대가 있었다. 40년 전, 한국 자동차 산업이 초창기였을 때는 관찰하고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한국 차는 이미 트렌드의 시작이다. 특히 전기차와 수소차는 선두에 서 있고, 유럽을 리드하고 있다.”
가장 애착이 가는 모델을 몇 개 꼽아본다면.
“보면 가장 반가운 차는 골프4다. 아우디의 A2도 애착이 많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동료가 A2를 타고 있어서 매우 기뻤다. A2는 고효율 자동차로 최대한 가볍게 공기역학적으로 설계했다. 한국 차로 넘어오면 스포티지3와 K5를 좋아한다.”
디자이너란 어떤 존재인가.
“작은 물건을 만드는 건축가. 테이블도, 컵도, 치약도, 신발도, 안경도, 램프도, 컴퓨터와 스마트폰도 다 디자인의 산물이다. 자동차 디자인은 좀 더 난해하다. 움직이는 물건이고 복잡성의 매력이 있다.”
어떤 차를 타고 다니나.
“스타리아, 미래 지향적인 차다. 독일 집에서는 현대 싼타페와 기아 스팅어를 탄다. 제네시스 GV80도 종종 운전한다.”
당신의 디자인 영토는 계속 확장될까.
“나는 이제 차를 다룬다기보다는 기업 문화에 디자인적 사고를 적용시키고 있다. 혁신적인 전기차 시대에 맞는 브랜드 경영, 강력한 ‘디자인 싱킹’을 제시해야 한다(피터 슈라이어는 인터뷰 진행 후인 12월 17일 현대차그룹 디자인경영 사장에서 물러나 그룹 자동차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디자인 어드바이저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