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교습가인 아버지 전욱휴 대표의 손에 이끌려 전영인은 다섯 살 때 골프채를 잡아 모두가 선망하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LPGA투어에서 성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딸은 “아빠의 골프가 아닌 나의 골프를 하고 싶다”고 골프를 중단했었다. 사진 전욱휴
골프 교습가인 아버지 전욱휴 대표의 손에 이끌려 전영인은 다섯 살 때 골프채를 잡아 모두가 선망하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LPGA투어에서 성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딸은 “아빠의 골프가 아닌 나의 골프를 하고 싶다”고 골프를 중단했었다. 사진 전욱휴

올해 여름 우연히 아들 찰리의 스코어카드를 본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너무 나쁜 점수가 적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아들 찰리가 어떻게 경기하는지 직접 보러 갔다. 경기를 썩 잘해나가던 아들이 어느 홀에서 한 번 실수를 하더니 속된 말로 ‘뚜껑’이 열려서 연거푸 실수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점수가 형편없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우즈는 아들 찰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얼마나 화가 나게 됐는지 난 관심이 없단다. 하지만 네가 실수한 샷이 아니라 그다음 샷에 100% 에너지를 쏟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네 머리는 폭발할 정도로 가득 찰 거야.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샷은 바로 다음 샷이란다. 그 샷은 네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야. 네가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면 네 실력은 좋아질 거야.” 그 여름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찰리의 골프 실력은 훨씬 좋아졌다.

올해 2월 자신이 몰던 차량이 전복돼 목숨을 잃을 뻔했던 우즈가 재활 기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인터뷰에서 소개한 ‘골프 부자(父子)’의 일화 한 토막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메이저대회 15승을 포함해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최다승 타이 기록인 82승을 거둔 아버지에게 조언을 듣고 배울 수 있는 아들은 얼마나 좋을까, 선망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넘어서기 어려운 절대 경지를 지닌 부모 슬하에서 자란 이들 가운데 부모의 업적을 뛰어넘는 성취를 해낸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보면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골프 대디의 헌신’은 한국 여자 골프의 성장 비결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자신의 직업마저 포기하고 딸의 성공을 위해 10여 년 이상 운전사부터 캐디까지 맡아 한 수많은 골프 대디의 노고를 극성이라고만 깎아내릴 수 없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더 노력하라고 채근하는 골프 대디의 그늘서 숨 막혀 하는 선수들도 많다. 그래서 적절한 시기에 아버지의 그늘에서 독립하는 선수가 롱런하는 비율이 높다.

유명 골프 교습가 전욱휴(월드 그레이트 티쳐스 대표) 대표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선수인 전영인(21)은 한국 골프 대디와 딸의 사례 중에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시사점을 보여준다. 딸은 ‘골프 신동’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이력을 지녔다. 아버지의 권유로 다섯 살 때 골프채를 잡은 전영인은 열 살과 열두 살 때 두 차례 전 세계 초등학생들이 겨루는 US키즈 월드 주니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가 주관한 대회에서 5승을 하고 2017년까지 4년 연속 미국 주니어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2017년에는 타이거 우즈와 에리야 쭈타누깐이 우승했던 세계 주니어 메이저 대회로 꼽히는 폴로 골프 주니어 클래식 챔피언이 됐다. 그의 스타성과 자질을 높게 본 미 LPGA투어는 당시 만 18세가 되지 않았던 전영인에게 예외적으로 프로로 전향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LPGA 2부 투어 Q스쿨을 거쳐 2018년 2부 투어에서 뛴 전영인은 그해 11월 1부 투어 퀄리파잉(Q) 시리즈를 13위로 통과했다. LPGA 역대 Q 시리즈 최연소 통과였다.

하지만 미 LPGA투어 데뷔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한 전영인은 올해 4월 롯데 챔피언십 이후론 무대에서 보이지 않았다. 스트레스로 인한 장염 때문에 시합에만 나가면 장에 탈이 났다고 한다. 부상으로 인한 병가(病暇)를 뜻하는 ‘메디컬 익스텐션(Medi-cal Extension)’을 LPGA에 신청해 투어 카드는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는 골프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에게 골프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면서 “아빠를 위한 골프만 있었지, 나를 위한 골프는 없었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전영인을 볼 때마다 방송에 나오던 그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방송 ‘월드 그레이트 티처’를 진행하던 아버지 전욱휴씨가 세계 유명 교습가의 설명을 정리하고 “한번 보시죠” 하면 꼬마 전영인이 겁 없이 클럽을 휘두르며 내용을 그대로 재연했다.

아버지 전 대표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도중 골프의 매력에 빠져 미국 PGA 정회원(클래스 A 멤버)이 되고 골프 교습가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그는 골프에는 변하지 않는 5가지 법칙이 존재하며 그 틀 안에서 모든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골프의 첫 번째 법칙은 클럽헤드의 스피드(club speed)가 빠를수록 공은 더 멀리 날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클럽헤드의 길(club path), 세 번째 클럽헤드의 페이스(face angle), 네 번째 어프로치 각도(angle of approach)가 다섯 번째 정확한 임팩트 (impact)로 이어지면 누구나 ‘똑바로 멀리’ 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국에 골프 전문 콘텐츠 제작사 ‘전욱휴의 월드 그레이트 티쳐스’를 세우고 애니카 소렌스탐을 비롯해 골프 세계 톱 50명과 함께하는 골프 레슨 방송 800여 편을 제작했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전욱휴가 만난 월드 그레이트 티처’를 비롯해 골프 관련 책 9권을 펴냈고 방송 해설과 신문 칼럼니스트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골프 대학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전 대표는 하나의 이론적 골프 세계를 만들었다. 딸은 그 이론이 옳다는 걸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명 같은 존재였다. 위기를 맞은 듯한 아버지와 딸의 골프 실험은 어떻게 이어질까?

다시 몸을 만들며 2022년 LPGA투어 시즌을 준비하는 전영인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그는 골프 휴식기에 그림을 그리고 이웃집 아이들을 돌봐주는 보모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필드를 떠나면 아버지와 딸은 최고의 친구 사이라고 한다. 지난 4월 골프 중단 이후 그림 그리기와 보모 아르바이트를 했던 전영인은 “골프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골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진 민학수 기자
필드를 떠나면 아버지와 딸은 최고의 친구 사이라고 한다. 지난 4월 골프 중단 이후 그림 그리기와 보모 아르바이트를 했던 전영인은 “골프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골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진 민학수 기자

2022년엔 내가 행복한 골프 할 것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는 나에게 친구지만 힘든 존재다. 집에서는 정말 친구 같고 최고의 아빠다. 하지만 골프장에서는 친구 같을 수 없으니까 아빠도 힘드셨을 것 같다. 골프채 선택으로 의견이 안 맞아도 힘들고 시합 끝나고 실수 부분을 짚을 때도 힘들었다.”

골프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LPGA에 들어가면서 캐디를 맡았던 아빠와의 트러블도 있었지만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다. 매 시합 잘하고 싶었지만, 첫날 조금 잘못 치면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워서 둘째 날도 못 쳤던 것 같다.”

그럼 왜 골프에 복귀하나.
“골프를 안 해도 할 게 많다는 걸 알게 됐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 것도 골프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한 시합이라도 결과와 관계없이 나 자신이 행복한 시합을 하고 싶다.”

딸의 목소리를 전해주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내 삶의 우상은 영인이었다. 시간과 생각 등 내 삶의 가장 많은 부분을 바쳤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지금 영인이는 자신의 골프 인생을 간절히 살고 싶어 한다. 다섯 살부터 시작된 골프 인생에서 휴식은 한 번도 없었다. 좋은 결과를 수없이 만들어 왔지만, 자신의 의지보다는 아빠의 생각이 많았기에 흥미를 잃었던 것 같다. 영인이의 스윙 메커니즘은 매우 단순하고 기초가 단단하다. 지도자로서 볼 때 지금처럼 영인이가 간절한 마음으로 경기에 나선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것으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