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S 칼리스터’는 과학 문명의 발전이 불러올 문제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보게 하는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다. 사진 IMDB
‘USS 칼리스터’는 과학 문명의 발전이 불러올 문제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보게 하는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다. 사진 IMDB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행복하게 할까? 사람들은 이제 옆에 있는 사람은 바라보지 않는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도, 길을 걷거나 심지어 운전할 때조차 사람들의 눈과 귀는 가상공간을 보여주는 작은 기기에 고정돼 있다.

현대인은 내비게이션의 지시,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눌러주는 ‘좋아요’와 하트, 수많은 정보의 물결에 늘 떠밀려 다닌다. 그러다 문득 화면을 껐을 때, 모니터든 TV든 스마트폰이든 그 즉시 가상세계와 분리된 현실, 초라한 자신을 비추는 검은 화면, 블랙 미러를 마주하고 불안해한다.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칼리스터 게임 회사의 공동 창업자인 데일리의 현실도 초라하긴 마찬가지다. 많은 천재가 그렇듯 사회성이 모자란 그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앉아 폼 나는 인생을 즐기는 동업자 월튼과 달리 부하직원들에게도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신세다.

그러던 어느 날, 후줄근한 그의 인생에도 해가 뜨는 것일까. 매력적인 신입 여직원 콜이 그에게 호감을 보인다. 하지만 다른 직원과 이야기하며 업무 능력을 존경할 뿐, 이성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선을 긋자 숨어서 듣고 있던 데일리는 서운해진다. 그날 저녁 모두가 퇴근한 빈 사무실, 데일리는 콜의 입술이 닿았던 일회용 컵을 집어 들고 회사를 나온다.

데일리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매일 밤, 자신이 개발한 게임을 변형시킨 가상의 우주 함대, USS 칼리스터의 함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주의 악당과 대원들은 그를 서운하게 했던 회사의 직원들이다. 데일리는 그들의 DNA를 수집, 외모와 의식을 디지털로 복제해 게임 속 캐릭터로 만들어 마음껏 분풀이하고 있었다.

데일리가 카리스마 넘치는 대장 놀이를 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동안 현실의 직원들은 DNA가 도용되고 복제된 줄 모른다. 하지만 가상세계일망정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데일리에게 아부하고 환호해야 하는 복제 캐릭터들은 현실의 본체와 똑같은 인격과 지능과 감정을 갖고 있기에 자유를 간절히 원했다.

콜이 우주선 안에서 눈을 뜬다. 데일리가 그녀의 DNA를 채취, 함대의 대원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콜은 오래전 TV 드라마 ‘스타 트렉’을 모방한 함대의 조종실에서 만난 대원들, 즉 복제된 동료 직원들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분개한다. 콜은 탈출할 것을 제안하지만 대원들은 고개를 젓는다. 시도해봤지만 실패했고 데일리에게 들키면 어떤 고통을 받을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콜은 게임에 접속해 들어온 데일리에게 동료들이 굴욕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그녀도 겁 없이 반항하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고문을 당한다. 현실에서는 그토록 소심한 데일리가 게임 속에서는 무자비하고 야비한 본성을 무제한 발휘하는 괴물이었다니….

콜은 포기하지 않고 치밀한 탈출 계획을 짜고 대원들을 설득한다. 마침내 모두의 동의를 얻은 콜은 나긋나긋하게 데일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외딴 행성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다. 콜은 대원들과 함께 데일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USS 칼리스터’는 과학 문명의 발전이 불러올 문제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보게 하는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다. 현재 시즌 5까지, 총 22편이 공개됐으며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많은 영화, 드라마가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담고 있다. 왜곡된 인종 차별과 성 정체성에 기인한 증오 가득한 세상, 개인 복수와 가족 파괴를 지향하며 범죄와 살인과 전쟁이 만연한 세계, 좀비·유령·괴물 또는 외계인에게 점령당한 지구 그리고 독재자 치하에서 개인의 자유가 말살된 전체주의 사회 등, 미래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블랙 미러’도 과학이 발전한 어두운 미래를 암시한다.

특히 인간의 뇌를 컴퓨터와 연결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문제에 다양하게 접근한다. ‘블랙 미러’ 세계에서는 사람의 의식을 추출해서 다른 사람의 뇌에 이식할 수 있다. 스캔한 뇌를 디지털화하여 달걀 같은 외장 하드에 저장해두고 개인 비서처럼 활용한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용의자의 자백을 대신 받거나 기억을 꺼내 범죄 사건의 증거로 사용한다. 식물인간이나 죽음을 앞둔 사람의 인격을 인형이나 홀로그램에 넣어 되살리기도 한다. 1년 마실 커피값이면 평생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녹화하고 저장해서 영화처럼 재생해 볼 수 있기에 거의 모든 사람이 작은 칩을 몸속에 넣고 살아간다.

스마트폰보다 몇 배 더 간편하고 유용해서 필수품이 된 기기가 가져올 편의, 하지만 그 이면의 묘사가 두려워지는 건 허무맹랑한 공상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SNS)와 메타버스(metaverse·현실과 가상이 혼합된 세계) 플랫폼 같은 가상공간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있다. 인간의 지성과 인격을 디지털화하는 마인드 업로딩도 더 이상 낯선 용어가 아니다.

‘뉴럴 링크’의 설립자 일론 머스크는 사람의 뇌에 컴퓨터 칩을 이식하는 기술이 2022년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뇌 복제를 연구하는 ‘2045 이니셔티브’도 사람의 인격을 홀로그램이나 다른 인체에 이식하는 영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전제할 때 ‘블랙 미러’는 과학의 발전이 불러올지도 모를 먼 위기에 대한 경고라기보다 우리가 맞이할 가까운 미래에 대한 예고편인 셈이다.

‘블랙 미러’의 다른 에피소드와 달리 ‘USS 칼리스터’는 권선징악적 해결과 해피엔딩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각을 살짝 바꿔보면 섬뜩한 결말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무시받은 데일리가 게임 속 캐릭터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응징당하는 것은 정당할까? 디지털과 인간의 싸움에서 인류의 패배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란 무엇인가? 디지털로 복제된 의식은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인가, 한낱 프로그램인가? 나의 뇌를 복사해서 다른 인체나 기기에 옮겨놓는다면, 그건 나일까 아닐까? 과학이 발전할수록 철학적인 논의가 절실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장치를 만든다 해도 욕망이 존재하는 한 과학의 발전을 막을 수 없고, 탐욕이 엇갈리는 한 드라마가 예고하는 혼란과 위기 또한 피할 길은 없다. 결국 미래 세계에서도 어떤 가치관을 지키며 살 것인가, 그 경계를 결정하는 건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