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고택 솟을대문. 사진 최갑수
추사 고택 솟을대문. 사진 최갑수

먼저 ‘세한도’에 대해 이야기하자. 추사 김정희(1786~1856)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림 세한도. 눈도 내리지 않은 마른 겨울에 소나무 고목과 잣나무, 그 아래 허름한 집 한 채가 텅 빈 화폭에 그린 듯 만 듯 간략하다. 장식이라고는 없다. 앙상한 나무와 울타리도 없는 빈한한 집. 황량하리만큼 텅 빈 느낌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엘리트로 꼽히던 추사였지만 그 역시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추사가 44세이던 1830년, 당시 요직을 섭렵했던 부친 김노경은 어지러운 정국과 정쟁의 파고 속에서 탄핵받는 일이 발생했고 김정희는 꽹과리를 치며 부친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김노경은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40년에는 추사 자신마저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한 대정현에서 추사는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음식은 거칠어 목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날씨는 맞지 않아 걸핏하면 앓아누웠다. 추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책뿐이었다. 역관이었던 추사의 제자 우선 이상적은 그런 추사에게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들을 구해준다. 유배 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는 우선의 행동을 보며 추사는 ̒논어̓의 구절을 떠올렸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라는 뜻이다. 추사는 우선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그 그림이 바로 걸작 ‘세한도’다.

제주 대정읍에는 그가 유배 생활 중 머물던 적거지가 있지만 추사 김정희의 발자취와 정신을 좇아가는 첫걸음은 충남 예산에서 시작해야 옳다. 이곳에 그가 태어난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고택은 아직 건재하다. 방금이라도 방 어디에선가 추사의 칼칼한 헛기침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집은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대갓집 형태인 ‘ㅁ’ 자 집이다.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다. 안채에 6칸의 대청과 두 칸의 안방 그리고 건넛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도 보인다.

추사는 이 집에서 태어났지만 오래 살지는 않았다. 추사는 일곱 살 때 이 집 대문에 ‘입춘첩’을 써 붙이는데, 이를 본 북학파의 대가 초정 박제가는 ‘훗날 이 아이가 학문과 예술에 큰 인물이 될 것’을 예언, 스스로 스승이 될 것을 자처했다. 그는 추사에게 학문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청나라 석학들과의 학문적 교류도 주선했으며 훗날 추사가 실사구시 학문의 대가이자 금석학의 지존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추사의 천재성은 조선에서만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연경학계의 원로이자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은 그의 비범함에 대해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찬탄했고 청나라 학자 완원은 그에게 완당(阮堂)이라는 애정 어린 아호를 선사하기도 했다. 19세기 김정희는 옹방강, 완원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최고조에 이른 고증학의 진수를 연구했는데, 일제 강점기 시절 김정호 연구가였던 후지쓰카는 훗날 이들의 만남을 가리켜 한·중 문화 교류사의 역사적 사건이라 평하기도 했다.

처마 아래로 영롱한 겨울빛이 스며든다. 추사 고택을 거닐다 보면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이 곳곳에 주렁주렁 걸린 주련(柱聯)들이다. 이 주련들만 음미해도 이곳을 찾은 보람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일 두 가지는 농사와 독서라’ 등 하나같이 추사가 남긴 귀하고 아름다운 말들이다.

고택 왼쪽에는 추사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번잡스러운 석물로 치장돼 있지 않고 다만 생전에 남긴 글씨를 집자한 비석 하나만 있을 뿐인 묘소는 깔끔하다. 그 옆으로 추사기념관이 있다. 추사의 작품 46점을 일 년 내내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다.


나혜석이 말년을 보낸 수덕여관. 사진 최갑수
나혜석이 말년을 보낸 수덕여관. 사진 최갑수

수덕사, 그 단아한 아름다움 앞에서

수덕사 가는 길,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영롱한 겨울 햇살이 스며든다. 수덕사는 예산을 비롯한 내포 지역을 대표하는 고찰이다. 방문객을 먼저 반기는 건 절 마당의 늙은 느티나무와 소나무다. 그 앞으로 꾸밈없는 외양의 대웅전(국보 제49호)이 서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고도 얼마나 세련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보는 이에게 팽팽한 긴장감을 전해주는 배흘림기둥은 아, 하는 탄성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장식 하나 없는 문살은 그 앞에 선 이의 마음을 지그시 눌러준다.

수덕사 아래에는 수덕여관이 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면서 여성 인권 운동에 앞장선 선구자였던 나혜석이 수덕사와 인연이 깊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변호사였던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은 개인전을 성황리에 끝내고 미국과 유럽 시찰에 나선 남편을 따라 구미 여행길에 오른다. 하지만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 화실에 다니며 그림 공부에 열중하던 가장 행복하던 시기도 잠시, 그녀의 인생은 천도교 교령 최린과의 염문설이 나돌면서 추락하기 시작하고 이혼을 하며 몰락을 가속화한다.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그녀는 수덕사로 와 5년간 지내게 된다. 당시 수덕사에는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 김일엽이 출가 수행자가 되어 머물고 있었다. 나혜석은 이곳에서 불교에 깊이 귀의했고 그림을 통해 세상과의 교류도 이어갔다. 당시 수덕여관에는 그림에 열정이 있는 청년들의 발길이 잦았는데 고암 이응로가 그녀의 대표적인 수제자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이 1958년 프랑스로 유학 가기 전까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여관 앞의 바위 조각은 그가 동백림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성함과 쇠함을 추상화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여행수첩

먹거리 덕산스파캐슬 인근의 고덕식당은 한우암소갈비를 낸다. 간장양념에 잰 두툼한 갈비를 양푼에서 건져 초벌구이한 손님상에 낸다. 육질이 부드럽고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연탄불에 굽는 탓에 불 향도 은근하게 밴다. 수덕식당은 수덕사 아래에 자리한 산채정식집이다. 더덕구이를 비롯해 다양한 산나물이 된장찌개와 함께 차려진다. 더덕과 산나물을 수덕골 자락에서 손수 길러낸 것으로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광시면에 자리한 광시암소한우마을은 3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619번 지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정육점과 음식점이 늘어서 있다.

가슴 따뜻한 노을 앞에서 서다 대흥마을은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무대다. 대흥동헌 앞에는 의좋은 형제 동상이 있다. ‘의좋은 형제’는 밤새 상대의 창고로 볏단을 나르다가 우연히 만난 형제 이야기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내용으로, 대흥마을에서 이성만 형제 효제비가 발견되며 실화로 밝혀졌다. 대흥면사무소 앞에는 달팽이미술관도 눈길을 끈다. 옛 대흥보건지소를 개조한 건물로, 대흥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가 자주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