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은 오는 2월 24일 2차 글로벌 공급망 실사보고서를 공개할 예정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맞아 100일 기한으로 작성된 1차 보고서는 2021년 6월 4일에 공개됐다. 1차 보고서는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그리고 희토류 같은 핵심 광물자원 등 4가지 분야에 대한 글로벌 공급망을 분석했다. 그 결과, 미국 기업들의 제조 능력이 취약한 데다, 해당 분야 상품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유인도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보고서는 다른 국가들이 정부 주도로 해당 산업을 지원하는 반면 미국은 그러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공급망 관련 국제 협력도 제한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해당 분야에서 자생력을 키우고, 동맹국들과 협력해 글로벌 공급망 불안 요소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공급망 재건을 위해 연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정부조달이나 연구개발(R&D) 지원을 통해 미국 내 제조 능력을 향상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더불어 강력한 노동 기준을 부과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2월 24일 공개 예정인 2차 보고서는 방위산업, 공공의료, 정보통신기술(ICT), 에너지, 교통, 농산물에 대한 공급망 분석을 추가한다. 미국 정부가 전략적으로 분류한 이들 산업 분야에 대한 글로벌 공급망 평가는 우리 기업들에도 중요한 함의를 제공할 것이다. 즉, 전통적으로 국제 통상의 영역이었던 글로벌 공급망 이슈에 이제는 안보가 개입하게 된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최적의 비용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교역을 통해 각국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것이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국제 통상의 전통적인 역할이었다면, 이제는 안보라는 변수가 추가됐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백악관 보고서의 명칭이 ‘회복력 있는(resilient)’ 공급망 구축을 표방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동안 취약해진 공급망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 국가에 구축된 기존 공급망을 미국에 취약한 공급망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유사시 미국의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미 저비용과 상업적 효율성의 기반 아래 형성된 글로벌 공급망을 재검토하겠다는 것은 안보의 관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전 세계 리튬의 60%, 코발트의 80%가 중국에서 정제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희소 금속인 리튬과 코발트는 자동차 배터리 제조의 핵심 소재들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공급망이 미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중요한 취약점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초기 마스크 대란을 겪었다. 단순해 보이는 상품인 마스크도 글로벌 공급망에 묶여 있었고, 공급망이 끊기자 요일별로 줄 서서 마스크를 구매해야 하는 불편을 경험했다. 최근 들어서는 요소수 부족 사태를 보면서 얼핏 간과할 수 있는 상품조차 공급망에 문제가 있는 경우 국가 경제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체감했다.
국제 통상에 자국 안보가 더 중요해져
그동안 국제 통상에 있어서 안보는 큰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은 이미 경제제재와 수출통제 조치를 통해 안보를 보장해 왔다. 안보 요소가 국제 통상에 눈에 띄게 등장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때부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1962년 냉전 시기 제정돼 사실상 사문화됐던 미국의 ‘무역확장법 232조(Section 232)’를 철강과 알루미늄의 수입을 규제하는 데 적용했다. 미국 내에서 적절한 규모로 철강과 알루미늄이 생산되지 않는다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거 당시 약속했던 미 중부 러스트벨트 지역의 철강 산업 보호를 위한 명분에 불과해 보였다.
오히려 안보는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서 더 정교하게 진화해 국제 통상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 관찰된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 실사보고서를 작성한 주체에서도 드러난다. 이 보고서는 백악관 외교 안보 보좌관과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이 작성을 주도했다. 경제부처인 미 무역대표부(USTR)나 상무부가 아닌, 백악관의 안보 담당 부서가 글로벌 공급망 검토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은 미 정부가 국제 통상 질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앞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동맹국으로 묶고, 믿을 만한 국가의 기업과 거래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신냉전 체제로 재편되는 국제 통상 질서에서 세계무역기구(WTO)로 상징되는 다자주의는 당분간 힘을 쓰지 못할 전망이다. 오히려 주요국들은 다자간에 합의된 국제 통상 규범보다는 자국의 통상정책을 무기화하고 있다.
19세기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는 한 국가의 재화 생산 능력이 모든 부분에서 다른 나라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더라도 각 나라는 상대적으로 더 유리한 산업에 집중하고 다른 나라와 무역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비교우위론’을 주장했다. 이 이론은 전 세계가 세계화와 자유무역을 강화시켜 나가는 배경이 됐다. 그러나 이에 따른 교역의 장점이 이제는 상대를 억누르는 수단이 되면서 교역상대국 간 이익의 균형이 힘의 균형으로 변질하고 있다.
기업의 경영 전략 수립 시 안보를 중요한 변수로 고려해야
이제 우리 기업들은 경영 전략을 수립할 때 안보를 중요한 변수로 고려해야 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됐다. 국가 안보에 기초한 주요국들의 통상정책이 WTO가 출범한 1995년 이후 형성된 글로벌 비즈니스 질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우리는 이미 자원의 무기화를 경험했다. 이를 통해 중동발(發) 석유파동이 동네 주유소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목도한 바 있다. 인류가 4차 산업 시대로 도약하면서 보다 복잡 다원화된 각국의 통상정책이 무기화된다면 자원의 무기화와는 차원이 다른 방정식이 될 것이다.
최근 미·중 간 패권 경쟁은 신냉전의 서막으로 볼 수 있다. 패권 경쟁의 한 축인 미·중 무역갈등은 통상정책의 무기화가 더욱 노골화됐음을 보여준다. 구냉전 시대에는 전략무기 개발로 경쟁했다면, 신냉전 시대에는 통상정책을 무기로 한 경제 안보가 최전선에 위치하게 됐다. 탈냉전 이후 서로 깊숙하게 연결된 공급망에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국제 통상은 이제 단순히 상품과 서비스의 교역만이 아닌 국가 안보를 보장하는 도구로도 기능하게 됐다. 이처럼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국제 통상의 상업적인 측면에 더해 그 안에 숨겨진 안보적인 측면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