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법정이 아닌 런던, 파리, 제네바,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는 ‘국제중재’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제중재는 양측이 상호 신뢰하에 소송을 하지 않고 제삼자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대체적 수단이다. 소송과 달리 단심제로 이뤄져 비용과 시간이 적게 든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가 신흥 중재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현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리나라 변호사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총 3회에 걸쳐 싱가포르가 국제중재 허브가 된 비결은 무엇인지 들어본다. 또 우리 국제중재의 현실을 되짚어보고 미래를 조망해본다.
윤병철 변호사가 2021년 11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인터뷰를하고 있다. 뒤 화면은 화상으로 인터뷰에 참여하고 있는 박은영 변호사. 사진 조선일보 DB
윤병철 변호사가 2021년 11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뒤 화면은 화상으로 인터뷰에 참여하고 있는 박은영 변호사. 사진 조선일보 DB

“싱가포르가 국제중재 허브가 됐다는 것은 분쟁 해결의 중심축이 서구에서 아시아 권역으로 점점 이동해오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나라도 싱가포르와 같은 선두 그룹과 함께 힘을 보태면서, 중·장기적으로 국제중재 시장 발전을 위해 더 큰 역할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박은영(사법연수원 20기) 김앤장법률사무소(김앤장) 국제중재팀 공동팀장에게 싱가포르는 ‘제2의 고향’과도 같다. 지금까지 50번 넘게 출장을 갔을 정도로 친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외자 도입이 한창이던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때부터 공동팀장인 윤병철(사법연수원 16기) 변호사와 함께 싱가포르를 ‘밥 먹듯’ 찾았다.

국내 주요 로펌들의 국제중재 활동도 이때가 태동기였다. 이후 24년간 이들은 국제중재라는 외길만 걸었다. 김앤장 국제중재팀은 우리나라 국제중재 분야를 선도적으로 개척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이 축적한 수많은 노하우와 폭넓은 네트워크는 국내 법률시장에도 ‘새로운 기회’를 가져왔다. 실제 우리나라의 젊은 변호사들도 싱가포르에서 외국 변호사들 못지않은 실력으로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명실공히 ‘국제중재 전문가’로 통하는 두 변호사를 최근 서울 종로구 내자동 김앤장 사무실에서 만나 우리 국제중재 산업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박 변호사는 국제중재 사건을 수임해 법리와 자문 등을 맡고 있고, 윤 변호사는 팀 인력 관리와 실무(프랙티스) 등을 총괄하고 있다.

박 변호사는 “싱가포르와 서울이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오히려 ‘윈윈’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8년간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상임이사로 활동하면서 홍보를 위해 런던, 몽골, 남미 등 전 세계로 출장을 다녔다”면서 “단순히 싱가포르 기관에 속해 일하는 차원을 넘어, 싱가포르로 국제중재 중심축을 옮겨와야 한국도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개인적 확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싱가포르가 도움을 요청할 때 헌신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현지의 수많은 동료와 지인들이 깊은 신뢰가 생겼다”면서 “15년 전 같은 사건을 수행했던 분이 싱가포르 대법원장이 되고, 검찰총장이 되면서 우정을 쌓았다. 중재인 선정이나 사건 병합 여부 등 이른바 기준을 세워가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싱가포르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응원한다”고 덧붙였다.

박 변호사는 싱가포르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분쟁의 중심지가 되려면 △공정하고 중립적인 중재인 △유능한 중재 변호사 △클라이언트(기업 및 투자자 등)라는 요소가 필요한데, 한국이야말로 3가지 조건을 충족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싱가포르를 중심지로 더 활성화시키는 동시에 아시아 주변 국가에 영향을 미쳐, 서구 주도의 국제중재를 아시아로 끌어오는 데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아시아라는 중심축에서 서울이 얼마나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가 숙제”라고 했다.

실제 미국과 영국 기업은 싱가포르 주변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 등 이른바 대륙법(Civil Law) 기반 국가의 기업들과 달리, 영미법(Common law) 법리를 적용한다. 대륙법 국가 기업들은 민감한 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영미법 기반의 디스커버리제도(소송 전 당사자가 갖고 있는 증거와 자료를 전부 공개)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박 변호사는 “영미계 로펌들은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우리도 그런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싱가포르 현지 절차를 바탕으로 한 노하우를 섞으면 가장 높은 역량을 뽐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싱가포르뿐 아니라 영국, 파리, 홍콩, 뉴욕 등 주요 국제중재지에서 충분한 성과를 거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변호사 늘리는 김앤장 

실제 김앤장 국제중재팀 변호사 60여 명 중 절반은 ‘외국인 변호사’다. 국제중재 실무 영역에서 영어로 주장 서면을 제출하고 변론도 영어로 해야 하기 때문에, 외국인 변호사들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윤 변호사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인도, 중국 등 세계 곳곳에 변호사들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법적 영역 간 토론을 통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들어 제시하고, 그 과정을 통해 역량을 축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판장을 맡는 분들이 주로 영미권에서 소송 변호사를 하거나 판사를 한 분들”이라며 “단순히 언어 문제를 넘어 법률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로부터 좋은 판단을 받으려면 그들을 이해하고 변론 방식을 통해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앤장 소속 외국 변호사들의 근속 기간은 긴 편이다. 조엘 리처드슨(Joel E. Richardson) 변호사는 미국 로펌인 아놀드앤드포터에서 근무하다 2006년부터 김앤장으로 옮겨 15년간 일했다. 독일 변호사인 카이야네스 베그너(Kay-Jannes Wegner)도 10년간 함께하고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와 스웨덴에서 변호사들이 합류했다.

현재 김앤장이 맡고 있는 싱가포르 관련 국제중재 사건은 10여 건에 달한다. 김앤장은 그동안 스위스 제약회사를 상대로 한 의약 신제품 출시 실패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 중국 게임 개발업체 지우링을 상대로 한 라이선스 계약 위반 및 로열티 미지급 중재 사건, 한화큐셀이 태양광 사업과 관련해 독일로부터 특허 침해 피해를 당한 사건, 두산중공업의 발전사업과 관련한 보츠와나 사건 등을 승소로 이끈 바 있다. 

윤 변호사는 “지난 2년간 화상회의로만 중재 절차를 진행했다. 새해에는 싱가포르에도 자주 가서 그동안 못 봤던 관계자들을 만나 기반을 다질 것”이라며 “무엇보다 차세대를 이끌 젊은 변호사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 변호사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보다 활동적으로 다른 국제중재인들과 섞여서, 물리적으로 만나지 못하면서 파생된 (국제중재 판단에 대한) 지역적 편차 등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면서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드는 데 선도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