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상의 영역이 확장하고 있다. 상품과 서비스의 교역을 넘어 이제는 인류의 지속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동안 국제통상은 상품무역의 자유화, 서비스교역의 활성화 그리고 지식재산권 보호가 주된 관심사였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무역기구(WTO)는 모든 국제통상 협정의 근간으로 1947년 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 시절부터 시작돼온 자유무역을 더 활성화했다.
1995년 WTO가 출범한 이후 164개국이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 국가가 차지하는 교역 비중은 전 세계의 98%에 이른다. 교역량은 GATT 시절인 1950년보다 약 40배 커졌고, 교역금액은 약 300배 증가했다. 회원국 간 이견으로 WTO 협정을 업그레이드할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사실상 실패하고 미국의 WTO 상소기구 보이콧으로 위기를 맞고 있지만, WTO는 전 세계 자유무역의 확장이라는 사명은 다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과 환경, 지속가능성의 부상
WTO에서 협상 속도가 더디므로 회원국들은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지역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최근 들어서는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같은 메가 FTA가 등장하고 있다. 회원국 전체 합의가 있어야 개정되는 다자협정과는 달리, 양자 간 또는 복수국 간 FTA에서는 뜻이 맞는 국가 간 새로운 권리와 의무의 합의가 용이하다. FTA 체결국들은 WTO에서 다루고 있는 전통적인 국제통상 규범에 더해 노동·환경 같은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을 담보하는 규범도 포함했다. 주로 국제노동기구(ILO), 파리기후협약 같은 별도 국제기구와 조약을 통해서 규율하던 규범들이 국제통상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기업들에 요구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의무와 유사하게, 국가 간 통상협정에도 인권과 환경 등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요구되는 규범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속가능한 발전 규범이 통상협정으로 들어온 이유는 자명하다. 통상협정에 포함되면 보다 효과적인 집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제통상이라는 상업적 이해관계에 지속가능성의 규범을 연계해 집행의 효과를 제고하려는 것이다. WTO나 FTA와 같은 통상협정들은 비교적 효과적인 분쟁해결제도를 구비하고 있는데, 한·미 FTA의 경우 금전적 보상까지 포함한다. FTA 당사국의 노동이나 환경정책이 교역에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되면 그 정책들은 FTA 분쟁해결절차 대상이 되고, 승소한 제소국은 이를 통해 상대국에 무역보복권한을 얻게 된다.
한·EU FTA 노동분쟁 사례
미·중 간 통상전쟁 와중에 EU는 노동·환경 분야와 같은 지속가능한 발전 규범을 강화하는 선두주자를 자처하며, 이를 통상협정에 포함해 교역상대국을 압박한다. 대표 사례가 우리나라와 EU 사이에 있었던 한·EU FTA 노동분쟁이다. 이 분쟁은 한국과 EU에 각각 최초의 FTA 분쟁으로 기록됐다.
EU는 2019년 7월 우리나라가 한·EU FTA 제13장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관련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문가 패널의 소집을 요청했다. EU는 우리 노조법상 노조 가입 범위 및 노조 임원 자격과 관련된 규정과 노조설립신고제도가 ILO 기본권 선언에 따라 노동권을 존중·증진·실현하기로 약속한다는 한·EU FTA상 의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한국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지속해서 노력한다는 한·EU FTA 합의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패널은 우리 노조법의 노조 가입 범위와 노조 임원 자격 관련 규정에 대해서는 EU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선을 권고했으나, 노조설립신고제도의 경우 우리 측 주장을 받아들여 협정에 위반되지 않는 것으로 봤다. 우리나라의 ILO 핵심협약 비준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EU FTA 의무는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의무이지 핵심협약 비준이라는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그간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하면서 EU 측 주장을 기각했다. 이로써 우리 정부는 EU가 제소한 두 개 쟁점에서 하나는 승소하고 나머지는 부분 승소했지만 패소한 일부 쟁점에 대해서는 이행 의무를 부담하게 됐다. 한·EU FTA는 노동·환경 분야에 대해 무역보복권한까지 허용하지는 않지만, EU로서는 ILO를 통하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우리나라 노동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얻은 셈이다.
EU의 기후변화 정책
지속가능성과 관련한 EU의 정책은 환경분야에서도 두드러진다.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일찌감치 도입했고, 이제는 EU 역내로 들어오는 외국 상품이 탈탄소 노력을 하지 않는 경우 부담금 부과를 예고하고 있다. 탄소조정국경제도(CBAM)가 그것이다. 자국 내 법령을 정비하는 것에 더해 교역하는 상대방 국가에도 이를 요구하는 것이다. 탄소를 줄여야 하는 기후변화 대응 비용이 만만치 않으므로, 자신들만 엄격한 규제를 취하면 자국 기업들이 경쟁에서 불리해지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CBAM은 EU 탈탄소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후변화 규제가 강화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제 수준이 낮은 국가로 탄소누출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멘트, 전기, 철강, 알루미늄 등 상품이 EU로 수입될 때 해당 상품에 내재된 탄소배출량에 대해 환경부담금을 부과하는 제도다. 2021년 7월 EU 집행위원회가 법안을 발의한 이후 현재 EU 의회에서 심사 중인데, 최근 EU 의회의 환경위원회 특별보고관이 수정 회람한 개정안에서는 기존 집행위원회 법안보다 더욱 강력한 규제 내용을 담고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CBAM 적용 대상은 기존 상품에 더해 유기화학물, 수소, 폴리머 등으로 확대됐고, 직접배출에 초점을 맞춘 집행위원회 법안과 달리 간접배출에 대해서도 규제를 확대하고 있다. 또한, 제도의 본격적인 시행 시기 역시 당초 집행위원회 법안보다 앞당기고 있어 각국 정부와 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다자 규범으로서 지속가능성
CBAM은 현재 국제통상법적으로 논란의 대상이다. WTO가 기후변화를 다루고 있지 않고, 기후변화의 구체적인 사항을 규정한 FTA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가능성 규범을 강화하려는 EU의 입장을 감안하면, 실제로 CBAM은 우리 기업들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EU 조치들은 외국 기업을 직접적으로 규제하려 하므로, 우리 기업들은 전통적인 국제통상의 영역에 노동과 환경에 이르는 지속가능성 위반 여부까지 챙겨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지속가능성과 같은 새로운 규범은 다자기구인 WTO에서 논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WTO는 회원국 간 소통의 장을 제공하고, 합의된 사항의 이행을 감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미·중 간 갈등으로 촉발된 일방주의적 통상정책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열었다. EU의 사례처럼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것도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점은 우려된다.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조치는 환영받아 마땅하나, 이 역시 다자간 합의를 통해 규범을 정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이어져 국제 질서의 예측 가능성이 더 떨어진 지금, 근시일 내 다자 규범의 형성은 요원해 보인다. 변화하는 국제 질서에 더욱 민첩한 대응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