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만 명이 본 미국의 신경과학자 리사 제노바의 테드(TED) 강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85세 노인 중에서 둘의 하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다. 당신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돌보는 보호자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쓴 책 ‘기억의 뇌과학’은 인간이 기억하고 망각할 때 뇌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탐구했다. 문장은 유익하고 정밀하며 관대하다. 예컨대 그는 시간의 힘을 견뎌낼 만큼 의미 있는 기억만이 살아남는다고 쓰고 있다. 치매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구멍 난 배에 물이 차는 것을 막을 순 없지만, 늦출 수는 있다고 했다.
평소 인생은 기억과 기분과 기대의 하모니라고 생각하던 나는 그중 가장 큰 지분을 가진 기억의 대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리사 제노바는 하버드대에서 신경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책 ‘기억의 뇌과학’은 발간 즉시 뉴욕타임스(NYT)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는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망각의 고통’과 싸우는 여성을 그린 소설과 동명의 영화 ‘스틸 앨리스’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기억은 신경망 형태로 머릿속에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다. 내 할머니는 2002년에 알츠하이머병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내 뇌는 시각 피질에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청각 피질에 있는 할머니의 웃음소리를, 후각 피질에 있는 할머니의 그린페퍼 양파볶음 향을 활성화한다. 자기공명영상(MRI) 스캐너에 들어간 사람에게 특정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 원하는 정보를 찾아 말 그대로 ‘뇌를 뒤지는’ 모습이 관찰된다. 처음에는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뇌 여기저기가 활성화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건을 최대한 많이 모아야 이기는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억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기억이 없으면 내가 당신과 인터뷰했다는 사실도 내일이면 잊힐 거다. 정보와 경험을 간직할 수 없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평생 낯선 얼굴로 남는다. 옷을 입고, 양치질하고, 지금처럼 글을 읽고, 테니스를 치고, 운전하는 일에도 기억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내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로 살아왔는지 감지할 수 있다.”
우리의 날들 중 뇌에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보관되는 분량은 대략 어느 정도인가.
“오늘 경험한 대부분을 내일 잊는다. 1년 동안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는 날은 10일 내외다. 가까운 과거도 기억에 저장되는 분량은 3%가 채 되지 않는다. 결국 인생 대부분을 잊어버린다는 얘기다.”
고령 사회에 이르면서 한국은 점점 더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 어떤 질병인가.
“알츠하이머병은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시냅스에 찌꺼기를 형성하면서 시작되는 신경 변성 질환이다. 아밀로이드 찌꺼기가 침착되어 급변점에 도달하기까지 15~20년 정도 걸린다. 그 후에는 분자가 연쇄반응(molecular cascade)을 일으켜 신경섬유 엉킴, 신경염증, 세포 사멸, 그리고 임상 증상을 유발한다.”
단순 건망증과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
“열쇠를 손에 들고서도 찾았다면, 건망증이다. 열쇠를 냉장고에서 발견하고 잠시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의문이 들었다면, 아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모르면서 60년 전 등굣길은 기억해내곤 한다.”
노인들은 기억을 잃는 것보다 그로 인해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퇴행해서 가족과 사회에 부담을 지우는 일을 걱정한다. 왜 종종 순한 사람조차 치매에 걸리면 가족을 의심하고 성격이 고약해지는 걸까.
“자신이 치매에 걸린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치매 환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들이라는 사람이 곁에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종일 내 집에 머물면서 내 통장을 살펴보고 내 음식을 먹는다고 상상하면, 그 사람을 수상쩍게 바라보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나. 이 남자는 누구지? 내 통장을 갖고 뭘 하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 테니까 말이다. 말했듯이 증상은 끝내 전두 피질에서 편도체까지 영향을 미친다. 뇌가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감정을 더는 제어하지 못하게 되는 거다. 아기들의 감정이 얼마나 폭발적인지 생각해 보라. 아기는 전두엽이 편도체를 제어할 만큼 아직 발달하지 않은 상태다. 요는 치매 환자들이 성격이 고약해지는 게 아니다. 침식당한 뇌가 감정 폭발과 제어를 감당하지 못할 뿐이다.”
실제 뇌는 치매에 걸렸지만, 일상에서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았던 수녀들의 사례가 놀라웠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그 이유는 이 수녀들의 ‘인지적 비축분(co-gnitive reserve)’이 많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기능하는 시냅스가 더 많았다는 뜻이다. 정규 교육 수준이 높고,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우수하고, 정신을 자극하는 활동에 규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인지 예비 용량이 더 크다. 일부 시냅스가 손상된다고 해도 추가분의 백업 신경세포 연결이 많으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낱말 퀴즈를 많이 풀고 레드 와인을 마시는 습관은 기억력 유지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데.
“낱말 퀴즈나 레드 와인이 알츠하이머병 발병 위험을 낮춘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낯선 환경을 경험하고 피아노, 외국어, 글쓰기 등의 과제를 배우는 일이 인지적 비축분에 도움을 준다.”
부모가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면 자식의 발병 우려는 어느 정도인가.
“알츠하이머병 진단 사례의 98%를 보면, 물려받은 유전자와 생활 방식이 맞물려서 유발된다. 생활 방식을 조절하면 발병 우려를 현저하게 낮출 수 있다. 불량한 수면 습관, 건강하지 않은 식사, 운동 부족, 스트레스가 알츠하이머병의 발병 위험을 높인다. 급성 스트레스는 기억을 방해하고 만성 스트레스는 해마를 쪼그라들게 한다. 반대로 올바른 수면 위생, 건강한 지중해식 식단, 규칙적인 운동, 마음 수련과 요가 수련은 치매 예방에 실제로 도움이 된다. 심장병과 심장마비 위험도 놀라운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리사 제노바는 알츠하이머병의 발병 가능성을 현저히 낮출 수 있는 신약을 소개했다. 그것은 바로 잠이라는 약이다. 밤에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신경세포는 가장 중요한 청소 임무를 수행한다. 아밀로이드(여러 개의 단백질이 뭉쳐 섬유 모양을 형성할 수 있는 단백질 응집체)의 처리다. 또한 잠은 새롭게 부호화된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저장 버튼을 누르는 역할도 한다. 임상적으로 매일 7~9시간 숙면과 함께 20분 정도의 파워 낮잠은 기억력 향상에 획기적인 도움을 준다고 했다. 나아가 잘 기억하려면 불필요한 걸 잊어야 한다. 잘 기억하는 것만큼 잘 잊는 것도 축복이라고.
생애 마지막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기억 극장은 어떤 장면을 인출해 내나.
“뇌는 감정을 자극하고 예측을 벗어난 경험을 기가 막히게 가져온다. 첫 키스, 대학 졸업식 날, 자녀의 탄생 같은 주요 장면들⋯. 이런 일화 기억의 사건들은 대개 15~30세에 몰려 있다. 첫사랑, 첫 직장 등 첫 경험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사람의 기억 극장은 웃음과 경외로 편집돼 있고, 부정적인 사람의 기억 극장은 비극의 이미지로 플레이될 것이다.”
현대인은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 때문에 암기력이 바닥을 친다고 자책한다. 기억하려고 뇌를 다그치지 않고 검색 기능을 계속 사용해도 될까.
“물론이다.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고 기기에 저장한다고 해도 기억력은 약화하지 않는다. 과거의 지식에 의존하는 대신 나는 무엇이든 검색해서 정보를 얻는다. 검색을 활용하면 좀 더 많은 걸 배우게 된다. 만약 ‘스틸 앨리스’에 출연한 여배우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경우, 검색해서 궁금증을 해결하면 뇌가 다른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재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더 많이 기억하고 싶은 청년, 더 빨리 기억하고 싶은 중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은 노년에게, 각각 기억과 망각에 유용한 힌트를 부탁한다.
“모든 연령대에 동일한 조언을 드린다. 밤에 7~9시간 푹 자고, 뇌 건강에 좋은 건강한 음식을 먹고, 매일 운동하고, 만성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성을 낮추는 명상을 하라. 계속해서 새로운 걸 배우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평생 학습해야 한다. 과거로 플래시백 하는 것을 멈추고, 현재에 머무르는 연습,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는 연습을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85세 이후 우리 모두는 알츠하이머병 환자 혹은 보호자 둘 중 하나가 될 거라고 했다. 위로가 되는 것은 당신의 할머니 그리고 친구 그레그와의 일화였다. 할머니는 모든 가족을 잊었고, 딸조차 자신이 집 안에 들인 노숙자로 알았지만, 스스로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느꼈다는 것. 저널리스트였던 그레그는 알파벳을 잊고, 젖은 옷을 입고 올 정도로 모든 일상 기억을 잊었지만, 여전히 유머 감각이 풍부했다는 것. 당신은 이 사실로 무엇을 전하고 싶나.
“손녀이자 친구로서, 그리고 ‘스틸 앨리스’를 쓰기 위한 자료 조사로 알츠하이머병 환자 27명을 알아가면서 나는 깨달았다. 인간의 감정과 유대감은 알츠하이머병이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병의 후기에 접어든 사람도 여전히 사랑, 외로움, 기쁨, 슬픔, 분노, 평온함 등 인간의 모든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더라.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았다고 해도 삶은 계속된다. 기억이 없어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감정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사랑과 기쁨을 이해하는 능력은 더 예민해진다. 만일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서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이 아버지에게 전한 감정은 기억할 거다. 내 친구 그레그의 기억은 엉망이지만, 그는 여전히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듯. 알고보면 인간은 평범하고 당연한 일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데, 실은 평범하고 당연한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나날을 보낸다. 정작 인생의 매 순간을 기억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억은 전부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아이러니를 받아들여야 한다. 기억을 소중히 여기되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는 말라는 거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을까.
“치매가 걱정된다면 건강하게 먹고 열심히 배우고 푹 자라. 그러나 진짜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은 자신의 기억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