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령 아이디어와 아이템이 유망하다고 판단해 투자하더라도, 초기에 투자받은 기업일수록 중간에 와해되거나 서비스가 현실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운용사가 단순히 수익만 추구하려고 했다면 ‘얼리 스테이지(early stage)’에 있는 창업 초기 단계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백여현 한국투자액셀러레이터(이하 한투AC) 대표는 7월 26일 서울 대치동 본사에서 “한국투자금융지주의 사회공헌 일환으로 액셀러레이터(AC)를 설립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AC는 벤처캐피털(VC)보다 한 단계 앞선 시장에서 창업 초기 기업에 투자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투자금융지주는 지난 3월 한투AC를 출범했고, 초대 대표로 백여현 전 한국투자파트너스(한투파) 대표 겸 한국투자금융지주 사회공헌담당 부사장을 선임했다. 백 대표는 “기본 자금 지원뿐 아니라 팀 세팅, 교육, 네트워킹 등 단계별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만큼 AC는 발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라며 “사회공헌 목적이 아니라면 AC를 설립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설립 최소 7년 차 기업을 대상으로 수많은 검증을 거치는 한투파 평균 손실률도 50%가 넘는다”며 “한투AC는 그보다 4~5년 앞선 기업, 심지어는 설립한 지 6개월 된 기업에도 투자하기 때문에 리스크가 크다”고 설명했다.
앞서 한투AC는 7월 초 ‘드림챌린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첫 번째 투자 대상 기업 16곳을 선정했다. 한투AC는 매년 한투파, 한국투자증권 등 계열사와 함께 150억원 규모 벤처 펀드를 결성해 창업 초기 기업에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대학이나 유관기관과 연계된 드림챌린저 프로그램을 통해 투자 대상 기업을 선발하기도 하고, VC처럼 심사역들이 개별적으로 투자 대상을 발굴하기도 한다.
백 대표는 “매년 펀드로 조성되는 150억원에서 관리 보수나 운영 비용 등을 제외하면 약 120억~130억원을 투자하는 것”이라며 “기본적으로 드림챌린저에 선정된 기업에 50억원을 지원하고, 나머지 75억원가량은 후속 투자 재원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50억원을 다시 개별 투자 건수로 나눈다고 하면 한 기업이 투자받는 금액이 적어 보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창업 초기 단계에선 처음부터 무조건 큰 규모 자금을 지원하기보다, 차츰 밸류에이션(기업 가치)을 높이는 게 맞는다고 본다”며 “자금도 의미가 있지만, 사업 지속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통상 AC 시장에서 드림챌린저와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정해두는 밸류에이션은 10억원 정도로, 그 안에서 기업별로 5000만~1억원씩을 지원한다”고 덧붙였다.
백 대표는 올해 하반기부터 AC 시장 투자 심리가 본격적으로 얼어붙겠지만, 미래 아기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이 될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는 지속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매크로(거시경제) 변수는 주식시장, 기업공개(IPO), 프리 IPO 시장 순서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AC 시장이 받는 충격에는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투AC를 설립한 배경은.
“한국투자금융지주 차원에서 사회공헌 활동을 고민한 결과다. AC는 창업 초기 기업을 지원하는 벤처 펀드를 운용하는 회사다. 지주에서 자본금 200억원을 지원받아 출범했고, 향후 매년 300억원 증자를 약속받았다. 1년에 한 번 150억원 규모 펀드를 조성할 예정인데, AC가 펀드 운용사로 출자하고, 형제 회사(계열사)들이 함께 지원하게 된다. ‘바른 동행 셰르파’라는 펀드명도 한국투자금융지주가 기업의 주인이 아닌 성장 조력자가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업이 성장하는 데 올바른 길을 인도하고 책임 있게 같이 등반한다는 뜻이다.”
투자를 굳이 사회공헌이라고 표현했다.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6개월 만에 좋은 아이디어로 한 두 명이 모였지만, 자본이 부족하고 팀 세팅도 전혀 안 된 곳도 많다. 그런 기업에 시간적 여유를 갖고 투자해도, 당장 팀을 구성할 인력을 어디서 확보할지도 모르는 경우가 상당수라서 AC가 기술적인 부분, 네트워킹 등 여러 자원을 모두 지원해줘야 한다. AC 역할 자체가 상당히 발품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에 AC만 360개가 넘는 상황에 사회공헌이라는 명분이 아니면 한국투자금융지주까지 나서서 AC를 설립할 이유가 없다.”
리스크가 크지만, AC 투자에 나선 이유는.
“실패 확률은 높지만, 가능성 있는 기업들에 더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을 하며 계속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회공헌이라고 생각했다.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기업들이 계획대로 성장하고, 후속 투자를 받아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사회적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시도가 꾸준히 있어야 창업에 나서고, 도전하는 청년들이 용기를 얻지 않을까.”
최근 한투AC 첫 투자 대상 기업이 선정됐다.
“드림챌린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1기 투자 대상 기업을 선정했다. 올해 12월에는 2기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한투AC에서는 드림챌린저를 통해 투자 대상 기업을 선발하고, VC처럼 심사역이 개별적으로 유망한 기업을 발굴하기도 한다. 매년 투자하는 120억~130억원 중 드림챌린저에 기본적으로 50억원을 지원하고, 나머지 70억~80억원은 드림챌린저를 통해 성장하는 회사 후속 투자 등 재원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투자 금액이 적지는 않나.
“대부분의 AC가 돌리는 드림챌린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주로 밸류에이션을 10억원 정도로 정해놓고, 5000만~1억원 정도를 투자한다. 밸류에이션을 높게 인정받는다고 해도, 회사가 성장하는 데 의미 있는 자금을 지원하는 게 중요하다. 초기 창업 기업에 무조건 많은 금액을 지원할 경우 창업자 지분 대비 투자자 지분이 너무 커지는 지분율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좋은 비즈니스 모델, 아이디어라고 판단되면 초기에 적정 금액을 투자하고 2~3년 뒤 팀이 세팅되고 후속 지원을 이어가고 싶다. 자금 지원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2년 정도 지나고 프로그램 운영 등이 어느 정도 정착되면 투자 금액을 더 늘릴 예정이다.”
스타트업 업계가 혹한기를 맞았다는 평가가 있다.
“AC 시장은 이제 막 (혹한기가) 시작됐고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추워질 것이다. 기업 라이프사이클에서는 IPO 단계가 주식시장 한파를 가장 먼저 느낀다. 상장을 앞둔 회사 밸류에이션과 공모가가 확 떨어지고, 점차 프리 IPO 단계로 밀려오는 것이다. 최근 AC가 투자하는 시장 바로 직전까지 조정받았다. 올해 상반기만 기준으로 보면 AC 시장 전체 평균 투자액은 오히려 전년 대비 늘었는데, 시리즈 B, C 단계에서 주로 투자하는 VC가 수익률을 맞추기 위해 AC 시장으로까지 점점 눈을 돌린 탓이다. VC 입장에선 혹한기에 많은 금액을 투자하는 것보다는 적은 금액을 여기저기 뿌려 놓는 것이 리스크 분산 효과도 있다.”
혹한기는 언제쯤 끝이 날까.
“전반적인 매크로나 금융시장 흐름을 봐야 한다. 혹한기가 찾아올 때와 반대로 투자심리가 회복되는 순서는 주식시장, IPO, 프리 IPO 시장이 될 것이다. 비상장사 밸류에이션을 결정짓는 건 IPO에 나서는 기업에 대한 평가다. 동종 업종 기업이 IPO에 성공해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시장에 열기가 돌면 프리 IPO 시장도 다시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전반적인 투자 규모가 줄어들 수도 있나.
“사회공헌에 대한 이념을 공유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에 대해서는 투자를 이어갈 것이다. 위축된 시장에서도 기회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통상 한 번 조성된 펀드에는 소진율이라는 개념도 있어서, 투자를 하긴 해야 한다. 예를 들어 1~2년 전 만들어진 펀드에 재원이 많이 남았다면, 단계별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 투자한다. 좋게 해석하면 혹한기 속에서도 투자받을 기업은 투자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중장기적으로 유망하다고 보는 산업은.
“AC는 VC보다 앞단에서 트렌드를 읽어야 한다.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에서도 정보 보안에 주목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이미 정보 보안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비용 등을 이유로 도입을 못 한 곳이 많다. 기업과 단체의 규모를 떠나 정보 보안은 무조건 해야 하는 시기가 됐다. 특히 금융기관이나 대기업은 한 번 이슈가 터지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때 대부분 기업이 대형 정보 보안 업체들과 서비스 용역 계약을 맺고 있는데, 중소기업 등에서는 같은 조건으로 계약하는 데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 만큼 시장 파이가 더 커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