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올해로 우리 나이 90세가 된 아버지가 고향 집에서 쓰러지셨다. 요양보호사가 출근길에 아버지를 발견하고 급히 앰뷸런스를 불러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아버지는 당신이 언제 쓰러졌는지 몇 시간 만에 발견된 것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행히 병원 측의 응급수술로 아버지는 기사회생하셨다.
2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시골집에서 혼자 적적한 세월을 보내시면서 기력이 매우 쇠약해진 모양이다. 워낙 타고난 강골이신 데다가 기본 체력도 좋은 편이어서 자식들이 방심한 측면이 컸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두 분이 함께 매년 건강검진을 했는데, 2년간 건강검진을 건너뛴 게 화근이 된 것 같다.
“요즘 들어 소화가 잘 안 되고 입맛도 없고 속이 더부룩하고 그래!” 아버지가 전화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고령이신 탓이려니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아버지! 약국에 바로 가시지 말고, 가까운 병원에 가서 진료받아 보세요.” 그 증상이 아버지가 쓰러지시게 된 병의 전조증상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당시 나는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한 아들과 더불어 아버지를 모시고 3대가 함께하는 여행을 계획하고 호텔을 예약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시면서, 그 며칠 뒤로 예정했던 여행은 무산됐다. 다시 출국한 아들은 1년 후에야 돌아오는데, 아버지가 내년이면 기력을 온전히 회복하시고 ‘3대 여행’을 하실 수 있을까?
사실 저출산 문제에 나라의 미래가 걸려있다면, 고령화 문제에는 나라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걸려있다. 1933년생인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해방과 더불어 6·25 전쟁을 겪고, 분단을 겪으신 분이다. 그 이후에 진행된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과정은 물론이고 정보화, 세계화 과정까지를 생각하면, 아버지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그대로 관통한 셈이 된다.
나라를 잃은 망국의 비극을 가지고 태어났고, 해방정국의 혼란을 거쳐 동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몸소 겪었다. 보릿고개의 배고픔과 가난한 나라의 설움을 이겨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자 살자 일에만 매달렸던 산업화의 역군이기도 했다.
이런 노고 덕분에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도 만들어냈고,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라는 소리도 듣게 됐다. 우리나라가 이런 강소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오로지 아버지 세대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게 당신들이 손수 만들어낸 이 나라에서, 우리는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 아버지 세대의 노인들은 예전에 비해 평균수명이 많이 늘어나서 100세를 넘어 장수하시는 분도 많다. 현대의학의 발달과 문명의 발전으로 노인들은 건강과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이러한 건국 이래 최대 공신들인 아버지 세대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있을까? 외로움, 우울증, 사회적인 소외감 등의 문제가 없이 심신이 모두 건강한 그런 노년기의 여생을 누리고 있을까. 이렇게 자문해보면 우리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우리는 노인이 마땅히 우대받고,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노인들을 예우하기 위한 사회적 분위기나 인프라는 이런 당위적 언사와는 거리가 멀다. 뼈가 빠지게 일을 하며 자식들을 키우고,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면서 집도 사준 이들이 바로 우리 아버지들이다.
그러나 자식들이 결혼하고 일가를 이루면, 각자 제 직장생활, 가정생활에 쫓겨 정작 시골에 있는 늙은 부모님은 뒷전이다. 추석이나 설날 등 명절에나 겨우 찾아뵙는 게 고작이다. 그것도 어떤 때는 직장 일이 바쁘네, 애들이 수험생이네 등등 어쭙잖은 핑계를 대면서 고향을 찾아 부모님 문안 한번 여쭙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건 뭐,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 형제가 그랬고, 내가 그랬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낙상으로 고관절에 골절상을 입고 큰 수술을 받으면서 우리 가정의 일상은 일시에 무너졌다. 수술 후 재활을 할 병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대형병원에서 말하는 재활이란 대개는 급한 수술 끝에 단기간에 환자가 조금이나마 다시 몸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조치를 말한다. 더 이상의 입원을 통한 장기적인 재활은 쉽지 않다. 긴급한 수술 환자들이 몇 달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생계와 애들 교육에 쫓기는 자식들이 24시간 부모님을 케어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요양병원에 모실 수도 없다. 대개의 요양병원은 입원 환자에게 큰 사고나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진료에 임한다. 그나마 적극적인 재활과 요양이 함께 가능한 병원은 너무 고비용이다. 설상가상 그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장기간 대기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인생 말년에 병마와 싸워야 하는 노인들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60세 정년을 맞은 ‘어린 노인’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백세시대에 그들은 앞으로 30~40년을 버텨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재취업이라도 해서 제2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은 그나마 행운아 중의 행운아다.
그동안 자식들 키우고 교육하느라고 제대로 노후 준비도 못 한 이들은 눈앞이 깜깜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그다음 세대의 비혼, 만혼(晩婚), 저출산 등을 부추기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인구통계학적으로 인구 감소의 문제, 즉 출산율 감소와 노년 인구의 증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맥락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구학자 조영태 교수는 인구절벽 문제를 포함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정년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아니, 새로운 일자리도 부족한데 정년까지 늘리면, 우리는 영영 취업도 하지 말란 소리냐?”
기업 역시 임금이나 직급체계의 변경을 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기본적으로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젊은 인력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먼 산 쳐다보듯 한다. 물론 이러한 ‘어린 노인’ 말고 그보다 좀 더 연세가 있으신 경우, 사정은 더 힘들어진다. 노인 문제는 중년에 접어든 자식들에게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좀 더 나이 든 이들에게는 오래되지 않아 닥칠 바로 자기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위상이 급격하게 떨어진 노인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장 우리 부모님을 어떻게 모실 것인가, 혹은 내가 늙어 노인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노인을 위한 새로운 삶의 환경’을 고안하자고 역설한다. 노인의 능력과 경륜, 전통사회에서 가졌던 그들의 역할을 오늘에 맞게 되살리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환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말년을 불안, 우울, 무기력, 사회적 소외감 등의 심리적인 문제로 이중 고통을 받지 않도록 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아버지마저 쓰러지셨다가 겨우 기력을 회복하고 계신 것을 보면서 노인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횡설수설하게 됐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빨리 건강을 회복해, 여생은 큰 고생 없이 편안하셨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하루속히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서 아들·손주와 함께하는 3대 여행에 동참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인문예술 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