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와인들이 최근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중에서도 루마니아는 전 세계 와인 생산국 중 생산량 13위를 기록하며 인기가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루마니아 와인의 어떤 점이 와인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일까. 데알루 마레(Dealu Mare) 지역과 부두레아스카(Budureasca) 와이너리를 탐방하며 그 비결을 알아보았다.
루마니아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위치한 부두레아스카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문 앞에서 필자를 반긴 건 와인이 아닌 브랜디였다. 루마니아에서는 먼 곳에서 온 손님에게 브랜디와 함께 소금과 빵을 대접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소금이 화폐 역할을 했을 정도로 귀했던 시절, 손님은 빵과 짭짤한 소금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독한 브랜디로 피로를 풀었을 것이다. 따뜻한 호의를 마다할 수는 없는 법. 위장을 자극하는 브랜디의 화끈함에서 루마니아 사람들의 따스한 정을 느끼며 포도밭으로 먼저 향했다.
구릉 지형 덕에 다품종 재배 가능
부두레아스카가 자리한 데알루 마레(Dealu Mare) 지역은 루마니아의 보르도라 불릴 정도로 양질의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다. 데알루 마레란 루마니아 말로 ‘큰 언덕’이라는 뜻. 이름처럼 이 지역에는 넘실대는 구릉이 사방에 가득했다. 부두레아스카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르도네 같은 국제 품종부터 루마니아 토착 품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포도를 재배하고 있었다. 자라는 환경이 각기 다른 품종들이 어떻게 한 지역에서 생산될 수 있을까. 해답은 바로 구릉에 있었다. 구릉지는 고도와 토질이 다양하고 경사 방향에 따라 햇볕의 강도와 기온이 다르다. 따라서 어떤 포도든지 최적의 환경을 찾아 재배가 가능하다. 루마니아 와인 홍보대사인 디아나 파베체스쿠(Diana Pavecescu)는 루마니아 와인의 밝은 미래를 조심스레 예측했다. “공산 국가였을 때는 테루아(terroir·포도 재배 환경)를 무시한 채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는 단순하고 저렴한 와인만 생산해야 했다. 루마니아 와인은 이제 시작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 중이다. 와인의 95%가 내수 시장에서 소비되고 수출이 많지 않지만 영국과 독일에서는 이미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루마니아 와인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언급됐을 정도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기원전 1세기쯤 루마니아 땅을 지배하던 다키아 왕국의 부레비스타 왕은 포도밭에 불을 지르기도 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다키아에서 생산되는 맛있는 와인을 약탈하려는 외적의 침입이 너무 빈번하자 생산량을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설도 있다. “토착 품종을 점점 더 늘릴 계획이다. 국제 품종으로 만든 와인도 좋지만 루마니아 고유의 맛을 내는 건 역시 토착 품종이다.” 부두레아스카의 수석 와인메이커 스티븐 도넬리(Stephen Donnelly)의 말이다. 영국인인 그는 UC 데이비스에서 와인을 공부한 뒤 세계 각지에서 와인 컨설턴트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벌써 27년째 루마니아에서 와인을 만들고 있다. 무엇이 그를 이곳에 정착하게 했을까. “루마니아는 잠재력이 큰 곳이다. 언덕 위는 고도가 높아 기온이 평균 3도 정도 낮다. 토질도 사암과 석회암이 많아 화이트 품종을 기르기 좋다. 언덕 너머 백악질 토양은 스파클링용 포도 재배에 최적지다. 해양 퇴적물이 많은 땅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에서는 미네랄 풍미와 짭짤함이 느껴진다. 수억 년 전에 쌓인 소금 맛이 나는 것이다. 꿈꾸는 모든 와인을 만들 수 있는 곳이 바로 데알루 마레다.”
클래식부터 오리지니까지 여러 등급 생산
도넬리의 말은 이어진 와인 시음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큰 테이블에는 다양한 치즈와 햄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종류별로 즐기기 좋은 와인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만 봐도 부두레아스카가 얼마나 다양한 와인을 생산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부두레아스카는 가볍게 즐기는 ‘클래식(Clasic)’부터 최상급인 ‘오리지니(Origini)’까지 여러 등급으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었다. 화이트 와인은 풍미가 섬세한 것부터 풍성한 것까지 스타일이 다양했고, 특히 여러 가지 청포도를 섞어 만든 푸메(Fume)가 과일 향이 풍부하고 보디감이 적당해 다양한 음식과 즐기기 좋았다.
피노 누아는 달콤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질감을, 시라즈는 묵직한 보디감과 복합미를 뽐냈다. 토착 품종인 페테아스카 알바(Fetească Albă)로 만든 화이트 와인은 잘 익은 과일의 신선함이 돋보이고, 페테아스카 레갈라(Fetească Regală) 화이트 와인은 우아한 꽃 향을 자랑하다 치즈와 함께 즐기니 숨어 있던 살구 향이 폭발하는 반전 매력을 보여주었다. 페테아스카 네아그라(Fetească Neagră)로 만든 레드 와인은 농익은 과일 향이 가득하고 질감이 부드러워 우리 입맛에 잘 맞는 스타일이었다.
“루마니아 와인은 가격 대비 품질 면에서 최고다. EU의 투자로 최신 장비를 갖춘 와이너리, 해외에서 온 실력파 와인메이커들, 포도 재배에 최적화된 자연환경 등 모든 것을 갖췄다. 토착 품종이 우리에게 낯설다는 점이 유일한 장벽이지만, 한번 마셔보면 맛이 무척 친근하다. 와인 애호가부터 초보자까지 루마니아 와인은 모든 소비자를 만족시킨다.” 루마니아 와인을 수입하는 비니더스코리아㈜ 전재완 대표의 말이다.
품질·다양성 잠재력 큰 루마니아 와인
데알루 마레뿐만 아니라 레친타(Lechinţa)와 무르파틀라르(Murfatlar) 등 루마니아에는 주목할 만한 와인 산지가 많다. 부쿠레슈티의 한 와인 바에서 시음해 보니 같은 품종으로 만들어도 산악 지역인 레친타의 와인은 상큼하고 향긋하며 북해 연안의 무르파틀라르 와인은 진하고 묵직해 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품질과 다양성, 그것이 루마니아 와인이 인기몰이하는 이유였다. 루마니아는 아직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번 루마니아 방문은 와인계의 떠오르는 샛별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