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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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때가 있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기존에 속해 있던 시간에서 잠시나마 차단될 수 있다. 3박 4일간의 짧은 외국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눈 깜빡하는 사이 지나가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만 국경을 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듣는 비일상적인 시간은 세 번의 밤으로 환원되지 않는 긴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나에게는 지난 3일이 그랬다. 

여행을 준비할 때 꽤 정성을 들이는 건 가져갈 책의 목록을 정하는 일이다. 내 일상에 없는 곳에서 현실감을 뒤로한 채 지내는 동안엔 나와 먼 곳의 이야기를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 흡수한 것들로 인해 내가 다른 색깔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건 바쁜 일상을 쪼개고 비용을 들여가며 여행을 떠나는 첫 번째 이유다. 

이번 여행길에 가져간 책은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다. 여행지에서 경험한 많은 장면이 기억에 남겠지만, 이 한 권의 책과 함께한 시간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가장 오래 기억할 장면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난 며칠간을 떠올리면 소설 속 주인공부터 떠오른다. 나는 그와도 함께 여행한 셈이다. 

주인공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남성이다. 작가인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진 아내를 찾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상실한 존재를 찾기 위해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이야기인데, 실로 오랜만에 타지를 여행하는 나에게 기묘한 공감과 동감의 지점들을 제공해 줄 것 같았다. 소설은 모두 네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아내를 찾기 위해 미국을 찾는 과정에서 아내와 자신이 얼마나 달랐으며 서로를 증오했는지에 대한 독백 같은 내용이다. 두 번째는 과거 사귀었던 여성과 그 여성의 아이를 만나 함께 보내는 시간이고, 세 번째는 그들과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어 상념 속에서 아내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그가 동경하는 영화감독과 만남과 더불어 아내와 재회다. 

이 모든 과정은 헤어짐에서 재회로 이어지는 이별 극복의 과정으로 일축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이 소설의 서사는 무차별적 헤어짐에서 납득 가능한 헤어짐으로 이어지는 긴 이별의 시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내를 정말 아내라고만 해석할 필요는 없겠다. 나는 아내를 스스로와 불화했던 자신, 즉 타자화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자신과 서툰 이별에서 시작해 자신과 성숙한 이별로 끝나는 성장소설인 셈이다. 주인공이 걷는 길은 자기 자신과 잘 이별하기 위한 길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미국을 여행하며 얻게 된 긴 이별의 방식이란 무엇이었을까. 유럽적인 ‘나’에서 미국적인 ‘우리’로 건너가는 행로의 변경이다. 4부에서 그가 만난 영화감독은 ‘나’라고 해도 충분한 상황에서 걸핏하면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것이 전혀 특정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나’라는 일인칭 세계 속에서 자신과 타협하지 못하던 주인공은 ‘우리’라는 복수형 주어에서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끼지만 이내 그 세계에 매혹된다. 유럽식 단수의 세계에 속해 있던 사람이 매혹을 느낀 미국식 복수의 세계란 무엇일까. 


보편적 현실과 미적 현실의 중요성

페터 한트케는 일찍이 보편적 현실과 구분되는 미적 현실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다. 그가 미적 현실에 의지한 데는 궁핍하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환경이 작용한 바가 컸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의 속성이 불행으로 그치지 않는 곳이 바로 문학과 예술을 통해 닿을 수 있는 미적 현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문학과 예술이 ‘존재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의 공동체에서는 ‘나’와의 이별을 엔진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다른 사람이 되어 가며 타자화된 자신과 화해하는가 하면 타자와 연결되는 복수의 존재가 되는 가능성을 실현한다.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말은 작품 내내 부재로서만 존재했던 아내의 대사다. 그간 벌어진 일들이 다 사실이냐고 묻는 감독의 질문에 대한 아내의 대답인 것이다. 이때의 마지막 말은 아내라는 타자가 경험한 모든 현실에 대해 긍정함으로써 타자라는 현실을 긍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이 일인칭을 넘어서는 시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기억과 상상이라는 ‘허구적’ 이야기, 즉 미적 현실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현실과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실들을 ‘실제로 일어난 모든 일’로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가 탄생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적 현실을 가지는 것이다. ‘나’와의 기나긴 이별 끝에 다가온 ‘우리’이기도 하다. ‘나’와의 이별은 ‘우리’의 탄생을 가져온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나와 어떻게 이별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다시 만날 ‘우리’를 기다리며 나의 미적 현실을 작동시킨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Plus Point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사진 IMDB
사진 IMDB

1942년 오스트리아 그리펜의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문화적으로 척박한 벽촌에서 보내며 궁핍한 생활을 했으며, 스물아홉 살에 어머니가 건강 악화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비관해 자살했다. 이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첫 소설 ‘말벌들’을 출간했고 전후 독일 문학계를 주도하던 ‘47그룹’ 모임에서 독설을 내뱉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관객 모독’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등 언어적 실존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선보이며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해 왔다.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