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은 히어로(hero‧영웅)인 배트맨이다. 하지만 관객은 히스 레저가 연기한 빌런(villain‧악당) 캐릭터인 조커에게도 매력을 느꼈다. 사람들은 왜 악당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일까. 심리 실험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악당에게도 좋은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미시간대 심리학과의 수전 겔먼 교수 연구진은 지난 12월 국제 학술지 ‘인지(Cognition)’에 “사람들이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악당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내면에 나쁜 점을 보완하는 특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악당 내면에 선한 면 있다?
연구진은 4~12세 어린이 434명과 성인 277명을 대상으로 영화와 만화에 등장하는 악당과 영웅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실험을 진행했다. 악당으로는 디즈니 ‘인어공주’에서 문어발을 가진 악녀로 나오는 우르술라와 ‘피터 팬’의 후크 선장 등이 제시됐다. 픽사 ‘토이 스토리’ 주인공인 우디와 마블의 스파이더맨 같은 영웅도 제시됐다.
첫 번째 실험은 어린이들에게 악당이 친사회적 태도를 보일 수 있는지 물었다. 어떤 상황을 제시하고 동료 악당이나 아니면 반려동물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묻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언덕 아래 사람이 있는데 우르술라가 그쪽으로 돌을 던질지 아니면 사람을 피해 던질지, 반려동물인 뱀과 과자를 나눠 먹을지, 혼자 먹을지 묻는 식이다.
어린이들은 악당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쁜 행동이나 감정을 보일 것이라고 답했다. 연구진은 “어린이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좋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고 극단적인 형태의 악당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앞서 연구에서는 가상의 악당이 여성을 납치한 까닭을 묻자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답한 어린이도 있었다. 이번 결과는 이와 달리 어린이도 악당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두 번째 실험은 어린이와 성인 모두에게 영웅과 악당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물었다. 후크 선장이 자신의 속내가 나쁘다고 볼지, 나쁜 행동을 하고 마음이 편한지 아니면 불편할지 물었다. 실험 참가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악당은 내면도 압도적으로 악하고 부정적일 것이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내면을 보는 기계가 우르술라의 마음 깊은 곳에 선한 면이 있다고 판단할지, 우르술라가 마법의 약을 먹고 선한 행동을 하면 깊숙이 내재된 선한 면이 드러난 것인지 물었다. 실험 참가자들은 악당의 속마음과 겉모습이 다를 수 있으며, 그 차이는 영웅보다 더 클 것이라고 답했다.
악당의 내면에 좋은 점도 있을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논문 제1 저자인 발레리 움시드 박사과정 연구원은 “어린이와 성인 모두 우르술라가 늘 나쁜 행동을 하지만 속에는 선한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악당에게 반전의 모습이 있기를 바라며 매력을 느끼는 셈이다.
악당에게 끌리면 당신도 악당?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악당과 성격이 비슷한 사람이 악당에게 끌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덴마크 오르후스대의 마티아스 클라센 교수 연구진은 2020년 12월 국제 학술지 ‘시학(Poetics)에 “북미 지역에 사는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영웅보다 악당 캐릭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부정적인 성격 특성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 강아지’에 나오는 악녀인 크루엘라 드 빌이나 영화 ‘스타워즈’의 악당 두목인 다스 베이더, ‘매트릭스’의 기계 요원 미스터 스미스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심리학에서 이른바 ‘어둠의 3요소(dark triad)’라고 불리는 특성을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어둠의 3요소는 사이코패스(psychopathy), 나르시시즘(narcissism),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anism)이다.
심리학에서 이 3요소는 정도가 다를 뿐 누구에게나 정상적으로 내재하는 특성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 사람은 자기 통제력이 약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며 주변 사람들을 냉담하게 대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강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특성이다. 마키아벨리즘 성향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하며 냉소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의 성격과 악당 캐릭터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는 설문 조사를 했다. 이를테면 ‘나는 악당이 목표를 달성하기를 바란다’나 ‘나는 악당보다 영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느낀다’ 같은 의견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답하도록 했다.
설문 조사 결과, 어둠의 3요소 특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악당 캐릭터에 더 끌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전반적으로 남성이 악당에 대해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특히 젊은 남성들은 악당을 긍정적으로 보는 특성이 강했는데, 이들에게서 어두운 성격이 더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영웅, 악당보다 더 폭력적
그렇다면 아이가 악당보다 영웅 캐릭터를 더 좋아한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영웅을 따라 하다가 오히려 폭력적인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영화에 나오는 영웅이 악당보다 폭력을 더 많이 쓰기 때문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의대 연구진은 지난 2018년 미국소아과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 2015~2016년 개봉한 ‘엑스맨: 아포칼립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같은 영화 10편을 대상으로 영웅과 악당의 폭력 행동 빈도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악당은 1시간에 평균 17.5회 폭력을 행사한 반면, 주인공인 영웅은 22.7회로 더 많았다. 격투신이나 무기 사용 모두 영웅이 더 많았다. 악당은 협박이나 고문 사용 빈도만 영웅을 앞섰다.
오하이오 주립대 심리학과의 브래드 부시먼 교수는 CNN 인터뷰에서 “앞서 연구에서 어린이는 실존 인물이든 영화 캐릭터든 본보기가 되는 인물을 따라 한다고 나왔다”며 “영화는 좋은 사람이 폭력을 행사하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