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월 4일 찾은 텍사스 칼리지스테이션의 더치브로스. 차 9대가량이 줄을 서있다. 2 더치브로스 직원들은 반려견을 위한 음료도 무료로 준비한다. 사진 안소영 기자·블룸버그
1 2월 4일 찾은 텍사스 칼리지스테이션의 더치브로스. 차 9대가량이 줄을 서있다. 2 더치브로스 직원들은 반려견을 위한 음료도 무료로 준비한다. 사진 안소영 기자·블룸버그

“안녕, 모두들! 오늘 기분이 어때?(Hi, y’all! How are you?)”

2월 4일 토요일 오후, 풍차 그림이 그려진 드라이브스루 카페. 형광 반다나를 머리에 쓰고 후드티를 입은 직원이 정차한 자동차 옆에 태블릿PC를 들고 서서 안부를 물었다. 차 9대가 대기 중이었지만, 조급한 기색 없이 좋아하는 음료 스타일을 묻고, 인기 메뉴를 추천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결제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3분. 다른 카페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길었지만, 뒷사람들도 웃으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또 다른 직원이 나와 차에 앉아있는 손님들과 잡담을 나눴다.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카페 체인 ‘더치브로스(Dutch Bros)’의 매장 풍경이다. 1992년 설립된 더치브로스는 미국 서부 지역에서 드라이브스루 매장만 운영하지만, ‘넥스트 스타벅스’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 나가고 있는 데다 브랜드 이미지가 강력하고 팬층이 탄탄하기 때문이다. 

더치브로스의 매출은 2019년 2억3800만달러(약 2900억원)에서 지난해 7억2500만달러(추정치)로, 연평균 45%씩 늘고 있다. 같은 기간 매장 수도 370개에서 671개로 늘면서,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카페 체인으로 꼽혔다. 더치브로스가 이렇게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치브로스 공동 창업자이자 회장인 트래비스 보스마(Travis Boersma)의 전략을 살펴봤다.

1992년 손수레에서 커피를 팔았던 보스마 형제. 사진 더치브로스
1992년 손수레에서 커피를 팔았던 보스마 형제. 사진 더치브로스

망해가던 젖소 농장 대신 커피 손수레 끌다

1992년 미국 오리건주의 작은 도시 ‘그랜트 패스(Grants Pass)’. 낙농업에 종사하던 형제는 정부의 환경 규제로 젖소 농장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자, 새로운 생계 수단을 찾고 있었다. 당시 38세였던 형 데인 보스마(Dane Boersma)는 월마트 취직을 고민했지만, 21세였던 동생 트래비스는 그에게 사업 아이디어를 말한다. 대학 학기 중에 마셨던 모카커피를 떠올린 것. 그는 한 번도 달콤한 커피를 마셔본 적 없던 형에게 바닐라라테를 사주며 사업을 제안한다. 

두 사람은 한 달간의 실험에 나섰다. 먼저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 커피 원두 100lb(약 45.4㎏)와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입하고, 헛간에서 다양한 커피를 만든 뒤, 한 달 동안 무료로 나눠줬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두 사람은 네덜란드계 미국인과 형제라는 특징을 담아 ‘더치브로스’라고 이름 짓고, 시내 한복판에 손수레를 끌고 가서 커피를 판매했다.

형제는 커피만큼이나 고객과 관계에 큰 의미를 뒀다. ‘긍정적이고 사랑하는 삶’을 모토로 신나는 록 음악을 틀고, 손님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손님들은 절로 모였고, 6개월 만에 하루 200달러(약 24만원) 이상 매출을 내는 날이 이어졌다. 커피 손수레는 어느새 5개로, 직원은 30명으로 늘었다. 1994년에는 드라이브스루 형태로 첫 매장을 열고, 단골의 요청으로 메드포드라는 도시에도 가맹 계약 매장을 세웠다. 

형제는 더 이상 손수레에서 일하지 않았지만, 초기 문화를 유지했다. 바리스타 대신 친근한 느낌이 드는 ‘브로이스타(brother와 barista의 합성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고객과 정서적 관계를 강조했다. 브로이스타들은 고객이 파티에 찾아온 듯 환대했고, 격려의 말을 건네거나 하이파이브하며 기운을 돋웠다. 고품질 커피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메뉴에 초콜릿 음료, 스무디 등을 추가하며 손님들의 발길을 잡았다. 형제는 1999년에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기준에 부응하지 못하는 매장은 다시 인수하며 초창기 문화를 유지했다.

형 떠난 암흑기, 전환점으로

승승장구하던 더치브로스에도 ‘암흑기’는 찾아왔다. 2004년 8월, 화재로 설비 공장과 사무실이 모두 불에 타고 만 것. 다른 커피 체인의 도움을 받아 커피콩을 수급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형 데인이 루게릭병을 진단받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결국 형은 2009년 55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홀로 사업을 운영하게 된 트래비스는 중심을 잡아야 했다. 그는 더치브로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떠올린다. 바로 더치브로스가 ‘사람 중심 비즈니스’라는 것. 그는 매장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직원만 프랜차이즈 매장을 낼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 직급도 브로이스타부터 지역운영자까지 6단계로 구분해 직원의 리더십과 책임감을 키웠다. 리더를 꿈꾸는 직원에게는 커리어 코칭을, 다른 꿈을 키우는 직원에게는 대학·대학원 학비를 지원했다. 

그는 또 ‘더치 러브(Dutch Luv)’ ‘데인을 위한 한잔(Drink one for dane)’ 등 연례행사를 만들어 빈곤층과 루게릭병 환자들에게 기부했다. 

트래비스의 경영 철학은 매장에 활기를 더했고, 수많은 더치마피아(Dutch Mafia·더치브로스 팬을 이르는 말)를 양성했다. 브로이스타들은 단골의 이름과 음료 취향을 외우고, 손님의 강아지를 위해 푸파치노(puppy+cappuccino)를 무료로 제공했다. 고객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메뉴판에 없는 ‘시크릿 메뉴’를 판매했다. 때로는 남편을 잃은 손님의 이야기를 듣고 손을 모아 기도해주거나 가족의 암 발병 소식에 눈물을 흘리던 손님에게 ‘우리는 너를 사랑해’라는 손 글씨를 적은 무료 커피를 건네기도 했다. 더치브로스의 문화는 소셜미디어(SNS)에 공유되면서, 더 많은 고객의 발길을 모았다.

조스 리치 더치브로스 CEO와 트래비스 보스마(오른쪽) 더치브로스 공동 창업자 겸 회장. 사진 더치브로스
조스 리치 더치브로스 CEO와 트래비스 보스마(오른쪽) 더치브로스 공동 창업자 겸 회장. 사진 더치브로스

눈부신 성장은 ‘사람’을 기반으로 

트래비스는 2019년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2021년 9월, 더치브로스의 뉴욕 증시 상장을 성공시키면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뤄냈다. 더치브로스는 상장 당일에만 주가가 70%가량 뛰면서,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카페 체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더치브로스 주가는 다시 하락했지만, 여전히 증권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더치브로스 광고 비용은 매출액의 4%에 불과하지만, 입소문으로 광고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 ‘하얀 좀비(White Zombie)’ ‘공룡알 반란군(Dinosaur Egg Rebel)’ 등 개성 있는 이름의 시크릿 메뉴가 80종을 넘어섰고, SNS에는 매일 인증샷이 올라온다. 덕분에 10대 후반~20대 초반 고객이 51%에 달할 정도로 Z 세대(1997~2010년생)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매장당 평균 연간 매출(AUV)은 170만달러(약 21억원)로, 다른 드라이브스루 매장에 비해 높은 편이다. 

더치브로스는 직원 승진 문화 덕분에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시기 구직자 우위 시장에서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더치브로스 직원의 이직률은 66%로, 업계 평균(144%)에 비해 낮은 편이다. 최고 직급인 지역운영자 직급의 이직률은 0%에 가깝다. 더치브로스에 따르면, 현재 지역운영자 후보는 200명이 넘고, 이들의 인력으로 750~1000개 점포를 더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리더십 교육을 받고 있는 직원 수(900명)까지 고려하면, 매장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더치브로스는 매장을 올해 말까지 800개, 2025년 말까지 1000개, 2030년 말까지 4000개로 늘린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