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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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에 관한 모든 것(Shirley: vision of reality)’은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작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호퍼의 작품은 캔버스를 가득 채운 공간,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안에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외로운 인간상을 조명해 현대인의 고독감과 상실감을 표현한다.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바젤 사무소 건축가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바젤 사무소 건축가
오스트리아 태생의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은 영화에서 호퍼의 1931년작 ‘호텔 룸’부터 1965년작 ‘체어 카’에 이르는 13개 작품을 연대기순으로 나열해 단막극 형식의 장면들을 구성한다. 이들이 관통하는 30년은 미국 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 대공황, 매카시즘, 워싱턴 D.C. 인권 문제 등을 거치며 격변하던 시기였다. 호퍼의 각 그림에는 공통적으로 한 여자가 등장한다.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에서 이 여성들을 한 인물로 보고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연극배우 셜리라는 가상의 인물로 설정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셜리의 일상과 심리 상태를 독백 형식으로 묘사한다. 호퍼 작품에 내재된 의미들이 격동하는 시대 앞에 놓인 공허한 개인, 셜리의 삶으로 재해석된 셈이다.

회화와 공간의 차이

감독은 비엔나대 공대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그는 예술감독 한나 쉬멕과 함께 영화를 위해 호퍼가 그린 평면의 그림을 깊이가 있는 공간으로 정교하게 재탄생시켰다. 이 과정은 이미지와 물리적인 공간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우선 벽과 천장을 세우고 3차원 공간을 만든다. 회화에서 멈춰 있던 시간은 그 안에서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시시각각 움직이고, 공간 속의 모든 색채는 빛과 그림자를 따라 미묘하게 변화한다.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은 그림에서는 멈춰있던 커튼을 움직이게 하고, 담배 연기는 공기의 흐름을 따라 확산한다. 영화 속 공간은 자동차, 행인, 타자기, 갈매기 그리고 빗소리로 경계 바깥의 환경과 연결되고, 매 장면의 시작을 알리는 라디오 뉴스를 통해 시대와 연결된다. 등장인물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바닥이나 소파, 침대 등 공간의 모든 물리적인 요소가 재료의 질감을 드러내고, 우리의 시점도 계속해서 변화하며 공간을 인지한다.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중 한 장면. 사진 네이버영화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중 한 장면. 사진 네이버영화


이미지의 건축화

구축성, 물질성, 시간성 그리고 맥락과 관계성은 일반적으로 건축을 정의하는 특성이다. 따라서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영화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가 물리적 공간으로 치환될 수 있었던 것처럼, 특정한 공간 이미지로부터 그것을 온전히 재현하는 건축을 생산할 수 있는가. 통상적으로 평면도, 단면도, 입면도의 2차원 정보를 통해 3차원 공간을 구축하고 그 결과물이 이미지화되는 건축 프로세스를 역으로 진행할 수 있을까. 

영화가 개봉된 2013년, ‘셜리에 관한 모든 것’에 등장하는 세트는 오스트리아 빈의 퀸스틀러하우스에 전시됐다. 세트는 둘 혹은 세 개의 벽을 가진 미완성의 것, 즉 완전히 닫히지 않는 공간으로 구성됐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원작의 색채와 그림자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기계 조명으로, 창문 바깥의 배경은 렌즈에 담기는 각도에 맞춰 제작된 대형 그림으로 대체됐다. 특정한 카메라 위치에서 촬영된 영상의 모든 요소가 회화의 구도와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 벽을 기울여 설치하거나 왜곡된 비율의 가구를 배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박적인 요구를 반영해 영화가 이미지를 공간화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느슨한 조건에서 이미지를 건축화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제이슨 앨런이 AI 이미지 생성기 ‘미드저니’를 이용해 그린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사진 트위터
제이슨 앨런이 AI 이미지 생성기 ‘미드저니’를 이용해 그린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사진 트위터


새로운 건축 프로세스 가능성

지난해 8월, 예술계와 건축계에서는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가 화제로 떠올랐다. 디지털아트 부문 1등작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된 이미지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AI가 만든 작품을 독창적인 예술로 볼 수 있는지 논란이 일었지만, 주최 측은 결과를 뒤집지 않았다. AI를 또 다른 하나의 창작 도구로 인정한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작품이 중앙의 거대한 원형 창을 통해 압도적인 빛과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는 바로크풍 실내 공간의 이미지였다는 점이다. 

원작자 제이슨 앨런이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한 프로그램은 ‘미드저니’다. 이것은 키워드를 입력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프롬프트 형식의 AI 이미지 생성기다. 사용자는 자유롭게 여러 개의 키워드와 참고 이미지를 입력할 수 있으며, 입력 내용이 구체화될수록 원하는 바에 가까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키워드 종류는 제한이 없다. 원하는 공간을 설명하는 문장이 될 수도 있고, 공간의 느낌이나 분위기를 나타내는 형용사 및 부사, 참고 가능한 건축물이나 원하는 스타일을 구현한 건축가 이름까지도 가능하다. 사용자의 지식과 창의력이 상당히 요구된다는 점이 이 프로세스의 핵심이다.

이 같은 프로세스로 수많은 공간 이미지가 AI를 통해 생산될 수 있다. 이 결과물을 바탕으로 건축화하는 과정은 저작권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는 큰 장점이 있다. AI가 생성한 이미지가 아닌 회화는 에드워드 호퍼 같은 원작자에게 저작권이 있고,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SNS)에서 캡처한 공간 사진은 건축가에게 저작권이 있다는 점과 대조된다.

건축은 본질적으로 완결성과 영원성을 양손에 쥔 사회적 산물이다. 따라서 영화를 위해 제작된 세트 공간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무거운 주제들을 잠시 내려놓았을 때 이미지로부터 시작하는 건축 프로세스에 대한 상상은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한다. 그 결과로 구축된 실제 공간이 카메라가 아닌 인간의 눈과 감각을 통해 어떻게 경험될지는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