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종류가 너무 많아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쁜 일상에 와인 책을 사보거나 와인 클래스를 수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와인을 제대로 즐기려면 꼭 시간을 내서 배워야만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내 취향의 와인을 찾고 같은 와인도 더 맛있게 즐기는 법은 누구나 조금만 신경 쓰면 익힐 수 있다. 부담 없이 즐기면서 스스로 익히는 와인 자습법을 알아보자.
와인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보다 레이블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서다. 포도 품종이 적혀 있으면 대충 짐작이라도 가지만, 각 나라의 언어로 생소한 지명이 적혀 있으면 그야말로 ‘대략 난감’이다.
와인 레이블에 담긴 이야기들
와인은 왜 이렇게 레이블이 복잡할까. 잠시 와인 역사를 돌아보자. 인류가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000년 전이다. 서유럽에 와인 문화가 정착한 지도 2000년이 넘는다. 그 오랜 기간 유럽에서는 지역별로 와인 맛을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유럽의 와인 레이블에는 품종보다 지역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품종도 재배한 지역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고 여러 가지 품종을 섞어서 만들기도 하니 품종명보다는 지명이 와인 스타일을 파악하는 데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신대륙(비유럽) 국가들은 지역별로 와인 전통이 깊지 않아 레이블에 지명보다는 품종명을 주로 쓴다.
그렇다면 내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뭘까. 우선 레이블에 품종이 적혀 있는 와인부터 마셔보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레드 와인 품종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시라(Syrah), 피노 누아(Pinot Noir)가 있다. 피노 누아는 가볍고 섬세하며 메를로는 보디감이 적당하고 풍미가 부드럽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시라는 타닌이 많아 힘차고 구조감이 탄탄하다. 호주에서는 시라를 시라즈(Shiraz)라고 부르는데 호주산은 과일 향이 진하고 보디감도 더 묵직하다.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는 샤르도네(Chardonnay),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리슬링(Riesling)이 대표적이다. 소비뇽 블랑과 리슬링은 둘 다 가벼운 타입이지만, 소비뇽 블랑은 채소와 허브 등 신선한 풍미가 두드러지고 리슬링은 향긋하고 달콤한 과일 향이 매력적이다. 샤르도네는 모든 기후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스타일이 다양하다. 서늘한 지역에서 생산된 샤르도네는 경쾌하고 더운 기후에서 생산된 샤르도네는 묵직하고 부드럽다.
품종별로 두루 마셔보고 그중 내 입맛에 맞는 것을 찾았다면 그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지역별로 찾아 마셔보자. 그러다 보면 마음에 드는 지역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이후에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다양하게 마셔 봄으로써 좋아하는 와인의 폭을 넓혀 갈 수 있다. 이렇게 품종과 지역을 하나씩 알아가는 동안 틈틈이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와인 책을 한두 권쯤 구입해 참고한다면 차츰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다.
향을 음미하는 술, 와인 마셔보기
와인은 향을 음미하는 술이므로 온도와 잔이 무척 중요하다. 와인 잔은 음악을 감상할 때 스피커와 같은 역할을 한다. 훌륭한 음악을 제대로 느끼려면 좋은 스피커가 필요하듯 와인도 전용 잔으로 마셔야 풍미를 맘껏 음미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잔도 종류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고가의 와인 잔을 종류별로 다 갖추다가는 모아둔 비상금이 다 날아갈 판이다. 그러니 우선은 욕심내지 말고 다용도로 쓸 수 있는 잔 한 가지만 구비해 보자.
와인 잔의 핵심 기능은 와인에서 올라오는 향을 잘 모아주는 것이다. 그 기능에 가장 충실한 타입이 바로 피노 누아 잔이다. 브랜드에 따라서는 피노 누아의 주산지 명칭을 따서 부르고뉴(Bourgogne) 또는 버건디(Burgundy) 잔이라고도 부른다. 이 잔은 피노 누아의 섬세한 향이 잔 속에 가득 고일 수 있도록 폭이 넓고 입구가 좁은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레드나 화이트 가릴 것 없이 무슨 와인이든 피노 누아 잔으로 마시면 풍미가 잘 모아져서 특징을 파악하기가 쉽다. 일단 이 잔 하나로 다양한 와인을 즐겨본 뒤 좋아하는 품종과 지역이 몇 가지로 간추려지면 그에 맞는 전용 잔을 한 가지씩 추가로 구입해 보자. 와인 잔을 모으는 것도 와인을 즐기는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온도에 따라 풍미가 다른 와인의 세계
와인은 온도에 따라서도 풍미의 차이가 크다. 스파클링과 스위트 와인은 섭씨 6~8도, 화이트 와인은 10~13도, 레드 와인은 15~18도를 적정 음용 온도로 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레드 와인은 상온에서 마신다는데, 15~18도는 너무 낮은 것 아닌가. 이렇게 된 연유는 와인 책이 등장한 시기와 관련이 있다. 유럽에서는 19세기부터 와인 책이 활발하게 출판되기 시작했다. 난방 기술이 열악했던 과거에는 실내가 서늘했기 때문에 상온이 적절한 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20도가 훌쩍 넘는 요즘 실내 온도는 레드 와인을 마시기에 너무 따뜻하다. 온도가 높으면 알코올이 더 강렬해지고 타닌의 쓴맛도 부각되므로 음용 온도를 최대한 지켜 와인을 더욱 맛있게 즐겨 보자.
와인을 차게 식히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아이스버킷이다. 병이 충분히 담길 정도로 깊은 용기라면 무엇이든 아이스버킷으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굳이 따로 구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버킷 안에 반드시 얼음과 물을 절반씩 섞어야 한다는 점이다. 얼음으로 차가워진 물이 병을 고루 감싸야 와인이 더 빨리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화이트와 스파클링은 물론 레드 와인을 마실 때도 아이스버킷을 활용해 보자. 입안에서 와인이 살짝 시원하게 느껴질 때가 와인이 가장 맛있고 풍미도 제일 우아한 최상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