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제65회 그래미 어워드에 
참석한 퍼렐 윌리엄스. 사진 AFP연합
지난 2월, 제65회 그래미 어워드에 참석한 퍼렐 윌리엄스. 사진 AFP연합

2월 14일(현지시각) 국내외 언론은 세계적인 팝스타 퍼렐 윌리엄스(Pharrel Williams)와 관련한 소식을 앞다퉈 전했다. 그 직전에 끝난 제65회 그래미상 시상식이나 새로운 음반 발매 관련 뉴스가 아니었다. 언론이 전한 것은 윌리엄스가 1854년 설립한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남성복 크리에이티브가 됐다는 소식이었다.

루이비통은 2월 14일 트위터를 통해 이 결정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루이비통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CEO)인 피에트로 베카리는 “(이미) 2004년과 2008년에 루이비통과 (컬래버) 작업을 했던 퍼렐을 새로운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맞이하게 돼 기쁘다”며 “패션이라는 영역을 넘어서는 그의 창의적 비전이 루이비통을 새롭고 창의적인 시대로 이끌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밝혔다. 윌리엄스는 올 6월 파리패션위크에서 열리는 가을·겨울 컬렉션을 통해 루이비통의 디자이너로 처음 데뷔할 예정이다.

‘패션계 르네상스맨’ 아블로의 후임

윌리엄스가 루이비통 디자이너로 임명된 것은 ‘패션계의 르네상스맨’으로 불렸던 버질 아블로의 후임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루이비통 브랜드의 모기업이자, 프랑스 시가 총액 1위 기업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그룹 최초 흑인 디자이너였던 아블로는 패션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으면서도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가 된 특이한 사례다.

재봉사 어머니 밑에서 바느질을 배웠고,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건축학 석사학위를 받은 아블로는 기존 창조물에 3%의 변화를 줘 새로운 디자인을 만든다는 ‘3% 접근법’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시카고 현대미술관 등에 전시되기도 했을 정도다. 2021년 아블로가 암으로 사망한 이후 루이비통은 아블로의 자리를 1년 넘게 공석으로 남겨뒀다. 그 기간에 무성한 소문을 양산한 끝에 선택한 것이 윌리엄스다. 2018년 아블로를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로 앉힘으로써 패션계에 많은 화제를 낳았던 루이비통은 이번엔 그 자리에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또 다른 인물을 앉힘으로써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가수이자 음악 PD 퍼렐 윌리엄스

윌리엄스는 래퍼이자 음악 프로듀서(PD)로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음반 업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그래미상을 13차례나 수상했고 2014년 발표한 곡 ‘해피(Happy)’는 빌보드 핫100에서 10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가수의 이력에 가려지긴 했지만, 윌리엄스는 패션 분야 경력도 화려하다. 2000년대 초반 윌리엄스는 현재 겐조의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니고가 만든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베이프(Bape)’의 옷을 유행시키면서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면모를 처음 선보였다. 당시 일본에서만 인기를 끌던 베이프는 윌리엄스가 입으면서 전 세계에 유행을 탔고, 이때 쌓은 친분으로 윌리엄스는 니고와 함께 2003년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빌리어네어 보이스 클럽(Billionaire Boys Club)’을 론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윌리엄스의 패션 영향력이 스트리트 패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다양한 명품 브랜드도 윌리엄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루이비통 역시 그중 하나다.

1 현대 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와 퍼렐 윌리엄스가 2008년 공동 제작한 ‘심플 싱스(The Simple Things). 무라카미의 캐릭터 미스터 도브(Mr. DOB)의 입안에 퍼렐이 소중히 여기는 7가지 아이템을 내놓는 콘셉트로 전시. 사진 크리스티 2 2008년 프랑스 페로탱 갤러리에 전시된 의자. 사진 HYPEBEAST
1 현대 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퍼렐 윌리엄스가 2008년 공동 제작한 ‘심플 싱스(The Simple Things). 무라카미의 캐릭터 미스터 도브(Mr. DOB)의 입안에 퍼렐이 소중히 여기는 7가지 아이템을 내놓는 콘셉트로 전시. 사진 크리스티 2 2008년 프랑스 페로탱 갤러리에 전시된 의자. 사진 HYPEBEAST

선글라스로 맺은 루이비통과의 인연

루이비통과 첫 인연은 2004년 루이비통의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마크 제이콥스가 윌리엄스에게 선글라스 디자인을 의뢰하면서 시작됐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밀리어네어 컬렉션’은 윌리엄스의 지명도까지 더해져 1200달러(약 155만원)라는 비싼 가격에도 큰 인기를 끌었다. 원래 일회성 협업이었으나 높은 인기를 감안해 2007년 더 많은 색상이 출시되기도 했다.

이 성공에 힘입어 제이콥스는 2008년에도 윌리엄스에게 한 번 더 협업을 제안했다. 이번엔 좀 더 규모가 큰 주얼리 라인이었다. 윌리엄스는 보석 컨설턴트 카미유 미셀리와 함께 ‘블라종(Blason·가문의 문장을 뜻하는 프랑스어)’ 라인을 출시했다. 다이아몬드 등 고가 보석을 활용한 이 라인에는 이름처럼 왕가의 문장과 왕관, 르네상스 시대 디자인이 적극 차용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윌리엄스는 2019년 3월 샤넬과 함께 ‘샤넬-퍼렐 캡슐 컬렉션’을 공개해 기존 샤넬 분위기와 다른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디자인을 선보이는가 하면, 2010년엔 몽클레르와 방탄조끼 모양의 패딩 조끼를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2008년 프랑스 최고 메이저 갤러리 가운데 하나인 페로탱 갤러리에서 탱크 바퀴와 사람 발모양을 한 의자를 선보였고,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기간엔 외식할 때 플라스틱 소비를 제한하기 위한 용도의 휴대용 식기를 출시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패션 영향력을 넓혀왔다.

명품계 셀럽 의존 추세 보여줘

루이비통이 윌리엄스를 영입한 배경에 대해선 여러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몇 년간 명품 업계가 전문 다자이너가 아닌, 영향력 있는 셀러브리티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게 두드러진다”면서 비록 론칭 이후 2년도 안 된 2021년에 중단하긴 했지만 LVMH가 가수 리한나와 공동 운영한 패션 브랜드 ‘펜티(Fenty)’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콧대 높은 명품 업계에서도 셀러브리티의 파급력과 영향력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블로의 자리가 1년 넘게 공석으로 남아 있는 동안 LVMH가 힙합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카니예 웨스트를 타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여러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2015년 하이엔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이지(Yeezy)’를 론칭하기도 한 웨스트는 아블로와 친분도 두터워 유력 후보 중 하나로 점쳐졌으나 조울증과 예측이 불가능한 성격 등으로 인해 영입이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패션쇼 관객들이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기대한다는 점 역시 명품 패션 브랜드가 재능 있는 엔터테이너를 디자이너 물망에 올리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할리우드 스타나 K팝 등이 가미된 퍼포먼스가 패션쇼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 추세에 가수 등 엔터테이너들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NYT는 “루이비통의 이번 결정으로 오랫동안 얽혀 왔던(interwined) 패션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융합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아블로에 이어 루이비통의 또 다른 대범한 선택이 과연 성공으로 이어질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은 미지수라는 지적도 나온다.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전문성이 부족한 데다 유명세가 있는 만큼 구설수도 함께 따라온다는 게 이유다. 지난해 윌리엄스는 티파니와 함께 디자인한 선글라스로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패션지 ‘보그’와 ‘배너티페어’에 기고하는 보석 전문가 애너벨 데이비드슨은 해당 선글라스가 17세기 인도 무굴제국 왕족의 것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오윤희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