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수메르(Sumer)인은 가장 우수한 화폐제도 중 하나를 남겼다.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 즉 오늘날 이라크의 중심부에 자리 잡았던 고대 문명을 가리킨다. 충실한 기록보관자였던 수메르인은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기록한 수많은 문서를 남겼다. 19세기 들어 유럽인은 수메르 문자를 해독하게 됐고, 수메르 문서의 대부분이 상거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수메르인은 대단한 혁신가였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도시에서 살았고,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눠 관리했고, 산수를 이용해 연산했으며, 일과가 끝나면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맥주를 마셨다.
탤런트의 어원은 달란트(돈)
수메르인은 자신들의 숫자 체계인 60진법을 이용해 회계단위를 만들고 이를 통해 농산물 등 상품의 무게를 측정했다. 이들은 세겔(shekel), 미나(mina), 달란트(talent)를 무게 측정 단위로 사용했는데, 이러한 용어는 기독교 경전인 구약과 신약에도 자주 등장한다. 수메르의 최소 측정 단위인 세겔은 오늘날의 미터법에 의하면 약 8.3g에 해당한다. 이보다 큰 단위인 미나는 60세겔, 달란트는 60미나에 해당한다. 따라서 1달란트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30㎏에 이른다.
기원전 3000년쯤 사원에서 은 1세겔을 화폐단위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도시국가는 상품, 노동, 형벌 등 거의 모든 것의 가격을 세겔로 정하게 됐다. 오늘날 바그다드에 위치했던 에슌나에서는 은 1세겔을 주고 구리 180세겔 또는 양모 360세겔 또는 보리 600자루를 살 수 있었다. 은 1세겔은 노동자의 한 달치 임금에 해당하는데, 은 3분의 1세겔을 지급하면 마부와 마차를 하루 동안 빌릴 수 있었다. 현대의 언어학자들은 ‘재능’을 의미하는 영어 탤런트(talent)가 ‘돈’을 의미하는 수메르어 달란트(talent)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돈은 다양한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수메르에서는 형벌이 엄격하게 법정돼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같은 판사의 고무줄 양형이 불가능했다. 자유민 남자가 코를 물어뜯기거나, 눈을 잃은 경우 60세겔, 손가락을 잃은 경우 40세겔, 이빨이나 귀를 잃은 경우 30세겔의 벌금이 부과됐다. 자유민 남자가 노예를 죽인 경우는 자유민 남자의 얼굴을 때린 것과 마찬가지로 10세겔의 벌금이 부과됐다. 국가가 형벌을 부과하더라도 가해자가 피해를 보상하고 합의한 경우 형벌의 집행이 불가능했다. 국가와 개인이 처벌 권한을 나눠 가졌던 것이다.
한국은행에는 금이 없다
수메르 전체 경제에서 사원과 왕실의 운영경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했다. 임금에서 세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세겔 단위로 계산되고 지불되지만, 중앙정부가 경제를 계획하고 통제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세겔은 관료들이 정부 거래를 장부에 표시하기 위한 회계적 도구로 주로 사용됐다. 귀금속은 실제로 상거래에 유통되는 대신 보안이 철저한 금고에 보관됐다. 따라서 농부나 상인들은 직접 은 덩어리를 들고 가서 세금을 납부한 것이 아니라, 세겔로 계산된 보리, 양모 또는 기타 상품으로 세금을 납부했다. 궁전 밖에서는 신용을 기준으로 상거래가 이뤄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수메르의 세겔(은)은 오늘날의 금 보유 관행과 유사하다. 오늘날 전 세계 금 보유량 상당 부분(약 7055t)이 뉴욕 맨해튼에 있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지하 금고에 보관돼 있다. 이러한 금의 실소유자는 전 세계의 정부, 중앙은행, 공공기관이다. 영란은행(BOE)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4950t의 금을 런던의 지하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 2023년 1월 말 현재 한국은행에는 금이 없다. 2004년 한국은행이 보유하던 104.4t의 금을 전량 영란은행에 이전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는 공짜가 없기 때문에 영란은행에 상당한 보관료를 지급하고 있다.
미 연준과 영란은행의 지하 금고에서 잠자고 있는 금괴들은 모두 금본위제의 유산이다. 최초의 금본위제는 영국이 주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통제권이 넘어갔다. 금본위제 시대에도 예금주가 자신의 금(예금)을 타인에게 양도하면, 은행 직원이 지하 금고에 내려가서 이름표를 바꿔 달았을 뿐, 금이 실제로 금고를 떠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단지 금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했다.
오늘날에도 예금거래 당사자들은 자기 돈이 어디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사자들은 ‘거기 있을 가능성’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해한다.
부채의 화폐화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 보자. 수메르인은 거액의 채무를 설형문자로 기록한 뒤, 점토 상자에 봉인하고 표면에 채무자의 인장을 찍었다. 채권자는 점토 상자를 가지고 있다가, 채무자가 빚을 다 갚으면 봉인을 뜯어냈다. 점토판에 ‘소지인에게 상환할 수 있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경우, 그 점토판을 다른 사람에게 판매할 수도 있었다. 이 경우 부채는 그 자체가 거래 가능한 통화의 역할을 했다. 현대 경제학의 그럴듯한 수사학을 차용해보면, 부채의 화폐화가 이뤄진 것이다. 오늘날 영국 파운드화에는 “소지인의 요구에 따라 지급한다(to pay the bearer on demand)”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고대 수메르인은 현대적 지폐의 운용원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메르의 경제 시스템은 물물교환에 의존하지도 않았고,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주화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수메르의 경제 제도는 복잡한 부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운영됐다. 각각의 부채는 세겔이라는 가상화폐(장부화폐·account money)를 통해 특정되고, 최대 고용주이자 중앙 행정기구인 국가에 의해 뒷받침된다. 현대인은 금속, 종이 등 물리적 형태를 지닌 화폐 객체를 통해 화폐의 유통 가능성을 인식하는 반면, 수메르인은 추상적인 설형문자를 통해 부채에 유통 가능성을 부여했다. 강바닥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경제 시스템 내에서 유통되는 화폐가 보이지 않았다.
수메르인은 대출에 부과하는 이자를 마스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송아지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돈이 아이(이자)를 낳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수메르인은 돈이 출산능력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매월 원금의 60분의 1에 해당하는 이자를 부과했다. 수메르인은 60진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원은 국가에 대출하기도 하고 지역사회에 대출하기도 했다. 물론 개인들 사이의 대출도 성행했다. 흉년이 발생해 농부가 빚을 갚지 못하면, 농부는 채권자의 노예가 됐다. 수메르의 통치자들은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민간 부채를 탕감해 주기도 했다.
오늘날에서도 선거철이 다가오면 취약계층에 대한 부채 탕감 조치를 공약으로 내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수메르를 보고 있으면 “경제(학)에 있어서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네기시 다카시(根岸隆)의 명언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