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손민균 조선비즈 디자이너
일러스트=손민균 조선비즈 디자이너

#1│2001년 12월 2일(현지시각) 미국 텍사스주의 거대 기업 ‘엔론’이 파산했다. 연 매출 1000억달러(약 129조7000억원)를 기록했던 이 기업이 최고경영진의 주도하에 회계 준칙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 부채는 숨기고 손실은 적게 잡고 이익은 부풀리는 기법을 활용했던 것이 한계에 부딪힌 결과였다. 

이후 최고경영진과 이 회사 회계 감사법인을 둘러싼 여러 관련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창조적 회계’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피고인들이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회계 준칙을 ‘창조적으로’ 활용했을 뿐이지 어긴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나온 말이었다. 이때부터 ‘창조적 회계’란 말은 ‘회계 준칙의 허점을 악용하는 엉터리 회계 처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통계도 마찬가지다. 통계가 표본 선정 단계부터 얼마나 왜곡하기 쉬운지를 통계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통계를 내는 사람이 의도적 왜곡을 하면 이는 ‘창조적’ 통계라 불릴 만하다. 소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1906년 이렇게 썼다. “숫자들은 자주 나를 속인다⋯. 세 가지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빌어먹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 이런 통계가 ‘창조적’이기까지 하면 ‘빌어먹을 거짓말’보다 더한 거짓말이 될 것이다.

#2│로마 시대의 작가 플루타르크는 말년에 그 유명한 ‘영웅전’을 집필해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 50명의 전기를 다뤘다. 그중 루쿨루스라는 로마 장군의 이야기다. 기원전 1세기쯤 로마 동쪽의 강대국 아르메니아의 왕은 티그라네스였다. 로마의 확장으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자 그는 루쿨루스로부터 로마의 조공국이 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를 거절하자 루쿨루스는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첫 번째 전령(메신저)이 루쿨루스가 쳐들어온다고 알리러 오자 기분이 나빠진 왕은 그 전령의 목을 잘랐다. 이후 아무도 더 이상 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나쁜) 소식이 전혀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은 그냥 앉아서 그에게 아부하는 자들에게만 귀를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그는 루쿨루스 군대에 포위당했다. 이것이 바로 서양에서 가장 오래전 기록된 ‘메신저 쏘(아 죽이)기’의 사례라고 한다. 나쁜 소식을 듣고도 그것에 대처하거나 그 원인을 해소하기보다는 그 소식을 전한 자를 문책하는 행위다.

#3│그리스 신화에 저승 하데스(Hades)를 흐르는 5개 강 중 하나가 레테강이다. 죽어서 힘들게 저승 가는 길을 걸어온 망자들이 이 강을 건너면서 갈증으로 강물을 마시면 이전 기억을 모두 잃는다. 그런데 이렇게 ‘잊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 국어 교과서에서 ‘망각’이란 단원을 배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꼬마들이 배운 걸 잘 기억하지 못해 시험 점수가 안 나오자 너도나도 ‘기억력’이 좋았으면 하고 푸념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인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망각’ 즉 잊어버림이 얼마나 좋고 필요한지를 말해 준다. 인생에는 안 좋고 괴로운 일도 많아 이런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면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질 것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처럼 살다 보면 내가 잊고 싶은 일이 많이 생기고, 동시에 남들이 내가 잘못한 일은 물론, 아예 나를 잊어줬으면 하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경제대학장
현 세종대 부총장, 전 대성
합동지주 사장, 전 CJ그룹 전략총괄기획 부사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
김경원 세종대 경영경제대학장
현 세종대 부총장, 전 대성 합동지주 사장, 전 CJ그룹 전략총괄기획 부사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

유럽에서는 이렇듯 ‘나의 잊힐 권리’가 입법화된 사례가 있다. 2014년 스페인의 한 개인이 자신의 정보가 더 이상 검색되지 않도록 구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유럽연합(EU) 대법원은 ‘부적절하거나, 시간상으로 더 이상 의미가 없거나, 과다한’ 같은 ‘특정 조건’하에서는 검색되지 않게 하는 ‘망각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올해 초, 문재인 정부 당시 주요 국가 통계가 왜곡됐다는 의혹과 관련해 경찰이 전 통계청장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출범 초부터 분배 강화를 지향하며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 등을 밀어붙였던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의 결과가 오히려 양극화 심화라는 통계 결과가 나오자, 2018년 8월 당시 통계청장이 전격 경질됐다. 이후 등용된 통계청장은 취임 전 “최저임금의 효과가 90%”라는 보고서를 썼으며, 취임 직후에는 “좋은 통계로 보답하겠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문재인 전 대통령. 
사진 뉴스1
문재인 전 대통령. 사진 뉴스1

필자는 당시 한 경제 주간지에 기고하며 통계청장 경질은 ‘메신저 쏘기’형 인사이며, ‘좋은 통계’란 ‘창조적 통계’의 다른 이름이라고 규정했다. 실제로 그는 이후 표본집단과 조사 방식 등을 임의로 개편해 소득 양극화가 개선된 것처럼 통계를 왜곡해 발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에 지금의 여당은 이를 ‘중대한 범죄’라고 비판했으며, “청와대가 직접 개입해 소득·고용·집값 등 주요 국가 통계를 자신들의 소설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조작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여당의 당권 주자 한 사람은 이를 일개 수석이나 통계청장이 단독으로 감행할 수 없다며 확실한 뒷배로 전직 대통령의 존재를 암시했다. 

그런데 2020년 당시 문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퇴임 후 “잊힌 사람으로 그렇게 돌아가고 싶다”며, ‘기념’ 사업 같은 것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임기 중 이미 세금 2500조원 이상을 쓴 당사자가 잊힐 수는 없다며, ‘적폐 청산’이란 명분으로 전 정권 수장들의 잘못을 온통 털어왔으나 정작 자기 차례에는 이를 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비판한 기사를 내기도 했다. 하기야 미국 역대 대통령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밴 뷰렌, 타일러, 폴크, 필모어, 피어스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잊힌’ 이들은 재임 중 큰 업적도 없지만 큰 잘못도 없는 경우다. 

경제 문제만 국한해 봐도 재임 기간 최대의 집값 폭등, 역대 최고의 국가 재정 악화, 일자리 참사 등은 언급할 것도 없이 통계 조작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이것만으로도 ‘특정 조건’ 만족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 모두가 레테강을 건널지는 참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전임 대통령의 행보는 ‘잊히고 싶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책 추천 등 활발한 소셜미디어(SNS) 활동은 물론 집 근처에 9억원을 들여 ‘책방’까지 만든다고 한다. 

비판적 언론에서는 지지자들의 결집 장소이자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 창구가 될 것이라 지적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와 같은 맥락일까? 어차피 잊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더욱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것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