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9일(이하 현지시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분야 패권을 지키기 위해 ‘반도체 산업 육성법(CHIPS)’에 서명했다. 향후 5년간 527억달러(약 68조3729억원)를 투입하고 향후 10년간 미국에 반도체 제조 시설을 짓는 기업에 25% 세액 공제 혜택과 240억달러(약 31조1376억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은 보조금 받는 기업에 대해 향후 10년 동안 중국 등에서 28㎚(나노미터·1㎚=10억분의 1m) 이상의 첨단 반도체 제조 시설을 포함한 투자를 할 수 없도록 막았다. 중국 견제를 분명히 한 셈이다. 이와 함께 북미에서 조립된 전기차에만 대당 최대 7500달러(약 971만원) 보조금을 주는 내용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까지 지난해 8월 발효하는 등 미국 우선주의는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미 정부는 전기차에 탑재되는 배터리 부품과 광물까지 따져 핵심 광물 40%가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나라에서만 생산된 것이어야 세액 공제 혜택을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2024년 대선 출마 발표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은 연초부터 연일 경제 현장 행보에 나서며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2월 15일 75억달러(약 9조7087억원)를 투입해 미국 전역 고속도로·지역사회 등에 설치하는 전기차 충전기 50만 대를 모두 미국 내에서 제조하도록 하는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규정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모든 미국 내 프로젝트는 미국 노동자가 미국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해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와 함께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시행한 대중(對中) 고율 관세를 시한이 다 됐는데도 유지하기로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중 갈등을 격화시킨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와 닮았다. 필자는 “바이든 행정부는 과거에 미국이 오랜 시간 불평해 온 보호주의 정책을 되풀이하고 있다”면서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한 다자주의로 중국에 맞섰다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미지 크게 보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이 보여준 위대한 정치적 수완과 리더십은 익히 알려져 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을 발휘한 강대국으로서, 전쟁 패전국에 페널티를 주거나 배상금을 요구하는 대신 자국 지위를 이용해 모든 국가가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다자주의 글로벌 거버넌스 기구를 계획하고 설립한 바 있다.

앤 크루거 
미국 경제학회 회장
현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전 국제통화
기금(IMF) 및 세계은행 
수석 부총재
앤 크루거 미국 경제학회 회장
현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전 국제통화 기금(IMF) 및 세계은행 수석 부총재

새로운 국제 질서 아래서 전쟁 이후 재건과 경제 발전은 세계은행(WB)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국제무역 시스템의 경우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적인 협정과 ① WTO 등의 지지를 받으며 기반을 다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 금융 안정을 책임졌고, 유엔(UN)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같은 국제기구는 지정학적 긴장을 해결하기 위한 프레임워크를 제시했다.

여러 규칙에 근거해 만들어진 장치는 평화를 유지하고 모두의 번영을 촉진시켰다. 더 이상 세계에서 무력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고, 개방된 시장과 글로벌 무역 시스템 덕분에 수많은 가난한 국가가 자국민의 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사람들의 건강 개선, 기대 수명 연장, 교육 그리고 빈곤 감소 측면에서 눈에 띄는 개선을 보이기도 했다.

이 모든 성과는 다자주의의 성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미국은 이러한 글로벌 질서를 사실상 주도해왔고 현재도 이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전 세계 인구의 5% 미만을 차지하고,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의 5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직접 명령을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신에 동맹국의 지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미국이 다자주의를 원칙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환태평양 12개국이 체결한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협정인 ②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폐기됐다. 미국은 또 중국을 상대로 무역 전쟁을 시작했고, WTO 규정을 위반하며 중국산 수입품에 높은 과세를 부과했다. 그리고 WTO의 분쟁 해결 기구를 무력화하고, 미약한 근거로 추가적인 보호주의 조치를 도입함으로써 WTO를 약화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는 일방적으로 모든 조치를 취면서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다. WTO를 통한 다자주의로 중국에 맞섰다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많은 관측통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와 보호주의 정책을 뒤집고 더욱 국제주의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또한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이든 행정부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트럼프가 실시했던 ③ 대중(對中) 고관세 대부분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며, 미국은 자국 내 특정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나머지 국가를 차별하는 산업 정책을 전면 도입했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다자주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가운데 다른 국가와 경쟁으로부터 미국 내 경제를 보호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의 노력이 강화됐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명백히 충돌하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 효과를 동시에 얻기 위해 그들의 파트너와 동맹국, 특히 유럽 국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러나 (미국은) 경제적 자급자족을 추구함으로써, 유럽 국가의 수출을 방해하고 역차별하고 있다.

무엇보다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의 생산과 구매를 위한 보조금을 지원하기 위해 의회의 승인을 구했다. 미국 소비자는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한 필요 사항을 충족하는 전기차를 구매했을 때 7500달러(약 973만원)의 세액 공제를 받을 자격을 얻었고, 연방 정부는 70억달러(약 9조818억원) 규모의 새로운 전기차 배터리 생산 보조금을 지급할 것이다. 이 밖에도 미국 내 새로운 반도체 공장 건설 지원에 약 390억달러(약 50억5986달러)가 배정됐다.

보조금은 외국의 생산자보다 미국의 생산자에게 비용 측면에서 인위적으로 우위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든 행정부는 결국 미국이 오랜 시간 불평해 온 보호주의 정책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외국 기업들이 이미 추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미국에 신규 공장을 짓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미국은 새로운 무역 전쟁을 시작할 위험에 처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반도체의 경우, 어떠한 나라도 자급자족을 이룰 가능성은 작다. 또한 환경과 공중 보건을 포함한 많은 문제에 있어 다자주의는 공통의 글로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제품이나 기술이 적대적인 국가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는 방법은 우호국들과 다자주의 채널을 통해 협력하는 것이라고 본다.

자유무역에 기반한 다자주의 원칙은 상품 유통의 국제적 흐름을 관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안보 우려가 있다고 해도 보호주의는 정답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다자간 정책은 동맹국으로부터의 외교적 지원을 유지하고 미국 경제의 목표 달성을 촉진하는 데 있어 더욱 성공적이고 비용도 덜 들 것이다. 

ⓒ프로젝트신디케이트

Tip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체제를 대신하여 세계 무역 질서를 세우고 UR(Uruguay Round of Multinational Trade Negotiation·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는 국제기구. 1995년 1월 1일 정식 출범했다. 한국은 WTO 출범과 함께 가입했고, 중국이 2001년 가입하면서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자 미국은 중국을 고립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6년 보호무역주의와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며 당선됐고, 그는 취임 이후 WTO가 미국을 망쳤다며 탈퇴를 경고하는 등 WTO 힘 빼기에 나섰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WTO 원칙에 위배되는 보호주의 정책을 펴고 있다. 

2016년 2월 공식 서명을 마치고 12개국(미국·뉴질랜드·싱가포르·칠레·브루나이·말레이시아·베트남·페루·호주·멕시코·캐나다·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관세 철폐와 경제 통합을 목표로 추진한 자유무역협정 체제를 말한다. 그러나 자국주의와 보호주의를 주창하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 TPP가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비판하며 2017년 1월 TPP 탈퇴를 선언했다. 이후 일본 주도로 TPP 협상이 진행됐고, 미국을 제외한 11개국은 2017년 베트남 다낭에서 명칭을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변경한 후 2018년 12월 30일 발효시켰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7월 6일부터 무역법 301조에 따라 총 네 차례에 걸쳐 약 3700억달러(약 480조380억원)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최대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미·중 갈등이 심화하자 2020년 1월 중국이 앞으로 2년간 농산물, 공산품, 서비스 등 분야에서 약 2000억달러(약 259조4800억달러)의 미국산 제품을 구매하는 선에서 1단계 합의를 도출하면서 일부 품목을 고관세 대상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고관세는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2022년 7월부터 순차적으로 고관세 시한이 만료되고 있지만 대부분 계속 부과하는 방향으로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