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령작가’ 속 장면. 사진 IMDB
영화 ‘유령작가’ 속 장면. 사진 IMDB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거나 깊이 들여다봐도 괜찮을까. 다양한 삶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늘 행복하기만 할까.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인생을 풀어가는 일도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다. 인간이란 자기 생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마련이다. 타인의 영혼에 빙의된 선무당처럼, 다른 사람의 인생에 섣불리 뛰어드는 건 어쩌면 너무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미국의 어느 작은 항구, 어둠 속에 페리호가 닻을 내린다. 갑판을 떠나는 자동차들 속에서 주인 잃은 승용차가 덩그러니 남는다. 다음 날 새벽, 차가운 잿빛 해변으로 시신 한 구가 밀려온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영국의 전 총리 아담 랭의 최측근이자 그의 회고록을 담당하던 맥아라였다. 경찰은 술에 취해 배에서 추락했거나 집필 스트레스로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맥아라가 끝내지 못한 일은 유명인의 회고록을 전문적으로 대필하는 젊은 작가에게 맡겨진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그는 일을 수락할지 말지 고민한다. 전임자가 죽었다는 사실은 꺼림칙하고, 자살하기보다는 자살시킬 사람이었다는 소문은 불길하다. 출판사 면접을 마치고 나왔을 때 괴한들에게 미행당하고 폭행당한 것도 그를 불안하게 한다.

아담 랭이 총리였던 시절, 테러리스트로 추정되는 영국 국적의 용의자 네 명을 미국 CIA에 넘겨주었다는 의혹으로 세상이 소란해진다. 그중 한 명이 잔혹하게 고문받다가 숨졌다는 뉴스까지 보도되자 대필 작가는 또다시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망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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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9 : 300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1회의 산업재해가 일어나기 전엔 29회의 경미한 사고, 300번의 징후가 있다는 것이다. 천재지변이나 인생의 불행도 그럴지 모른다. 친절한 운명의 여신이 신호를 보내주었구나, 깨닫게 될 때가 있다. 계속되는 악몽과 불길한 예감, 할까 말까 반복되는 변덕과 망설임.

랭의 회고록은 출판사가 1000만달러(약 129억원)를 투자한 큰 사업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 분명한 책의 대필 작가로 알려진다면 향후 그에 대한 출판사의 대우도 달라질 터였다. 무엇보다 맥아라가 써놓은 초안 원고를 한 달 안에 마무리해주는 대가로 25만달러(약 3억원)를 주겠다는 제안은 ‘당장 달아나라’는 내면의 아우성에도 귀 막게 한다.

“전 당신의 유령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다 듣고 다 알고 그 사람인 척 글을 쓰지만 결코 앞에 나서지 않는 사람, 대필 작가는 미국에 도착해 처음 만난 랭에게 자신을 유령이라고 소개한다. 출판사 사장 소유의 별장에 머물고 있던 랭은 TV에서 보았던 대로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는 건 랭의 아내, 루스였다. 그를 맥아라의 후임으로 추천한 것도 그녀였다.

작가라기보다는 정책 조언자였던 맥아라가 써 놓은 수백 장의 초안은 전문 대필 작가의 눈에는 시시하고 지루하다. 어떻게 하면 대중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을까, 그는 고심한다. 매일 몇 시간씩 마주 앉아 랭을 인터뷰하고 기존 원고를 수정한다. 점차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된 유령작가는 랭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그를 대변하는 연설 원고도 쓰게 된다.

사건은 또 터진다. 영국의 전 외무장관 라이카드가 자국민을 CIA에 넘겨 죽게 했다는 혐의로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에 랭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것이다. 인권을 부르짖는 시위대와 기자들이 별장으로 몰려온다. 랭이 세계적인 뉴스메이커로 떠오르자 호기를 놓칠세라 출판사는 2주 안에 원고를 마치라고 작가를 독촉한다.

결백을 주장하며 라이카드의 배신에 분노하는 랭, 영국 정부가 왜 전 총리를 방어해주지 않느냐며 불안해하는 루스, 그리고 랭의 치명적인 약점인 게 분명한 이슈를 회고록의 핵심으로 부각하라는 임무를 맡은 유령작가가 저마다 느끼는 압박감은 극에 달한다.

서둘러 작업을 해가던 중, 맥아라가 랭의 과거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대학에서 연극부 활동을 하던 잘생긴 청년은 왜 정치에 몸담게 되었을까. 어떻게 아무런 기반이 없던 그가 젊은 나이에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을 제치고 총리가 되고,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개인의 역량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그런데 랭에게 정치적 재능이 있긴 했나. 그의 아내 루스가 더 뛰어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랭은 왜 지금, 영국을 떠나 미국에 와 있는 것일까.

“난 누구에게도 명령받지 않았어. 내가 한 모든 것, 다 내가 믿어서 한 일들이야.”

맥아라가 품고 있던 의심에 대해 질문하자 랭이 화를 내며 소리친다. 그러나 정말일까. 어쩌면 자기 손발에 보이지 않는 줄이 묶여 있었다는 걸 랭도 몰랐던 게 아닐까.

맥아라는 그 대답을 찾으려다 죽었다! 유령작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지금 당장 멈추라는 경고등이 머리에서 붉은빛을 번쩍이며 사이렌을 울린다. 그러나 빨강 신호등이 켜졌는데도 더 세게 가속기를 밟게 하는 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실체를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이다.

랭이 대학에서 연극부원으로 활동했다는 건 상징적이다. 영화는 대중 앞에 서는 정치인이란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배우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노골적으로 던진다. 그렇다면 그들 뒤에 있는 건 누구일까. 수많은 질문의 미로를 헤매던 유령작가는 맥아라의 원고 속에 세상을 뒤집어놓을 비밀이 감춰져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영국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2010년에 발표한 영화다. 랭은 피어스 브로스넌, 유령작가는 이완 맥그리거가 맡았다. 작가는 부인했지만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를 모델로 한 이야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작품이다.

감출 것 하나 없는 인생은 없다. 타인의 삶이 근사해 보이는 이유는 강 건너 멀리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불과 10, 보이지 않는 90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정치인이나 유명인뿐 아니라 누구도 그 베일이 걷히길 원하지 않는다. 사실을 알고 싶은 왕성한 호기심은 수많은 비밀이 감춰진 세상에서 그 자신을 가장 큰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진실과 개인 사이에 놓인 영원한 딜레마다.